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기적 일구어 낸 통복시장 매일상회 황정민 ①

▲ 평택 통복시장 매일상회를 40년째 운영중인 파독광부 오신일씨

죽지 않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

전쟁의 폐허가 채 가시지 않았던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을 세계와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나라로 만든 일꾼들인 파독광부 이야기를 통해 젊은이들에게는 패기와 용기를,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낸 어르신들에게는 긍지를 안겨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황정민(덕수 역) 주연 ‘국제시장’이 1400만 관객몰이를 한 덕택에 ‘파독 광부·간호사에 대한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박명재 의원 대표발의)’이 국회 사무처에 접수되었다고 한다. 법률안은 넘쳐나는 실업과 가난에 신음하던 60~70년대에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이 외화송금 등으로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노고, 희생을 기념하고, 이들의 공로에 걸맞은 예우 및 지원을 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파독광부는 1963년 12월부터 66년 7월까지를 1차 파견 시기라 한다. 2차는 70년 2월부터 77년 10월까지 총 7936명이 파견되었다. 그 중 2차 제4진으로 1970년 12월 9일 출국하고, 74년 8월 15일에 귀국한 오신일(75) 씨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기적을 일구어 낸 조국근대화의 역군이라는 자부심과 꿈을 다 펼치지 못한 아쉬움이 교차하는 기억 속에 살고 있다.

“당시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독일 가면 일자리도 있고, 돈도 많이 번다고 하니까 난리가 아니었어요. 백 명 모집한다고 했는데, 삼청동 해외개발공사에 가 보니 4~5천 명 모였어요. 그때만 해도 ‘빽 있는 사람만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어요.” 오 씨는 운이 좋아 뽑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파독광부 응모자격만 보면, 20~35세로 병역 필한 남자 중에 중졸 이상의 광산 경험자나 광산 근로에 적합한 신체 건강한 자를 뽑는다고 했는데, 시험 보러 온 사람들을 보면 학교 선생, 대학졸업하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어요. 나처럼 시골에서 올라 와 길거리에서 장사하다 가는 사람은 없었어요. 같이 출발한 사람이 142명이었는데 운이 좋았어요.”

1차 광부 파견 시기(63~66년)가 지나고, 2차 파견 시기가 시작되면서 독일에서 인력을 빨리 보내달라는 연락이 오니까, 공고 낼 겨를도 없이 먼저 시험 보고 떨어졌던 사람들 중에 몇 번씩 떨어졌던 사람들을 덤으로 뽑았다는 게 오 씨의 설명이다.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3년 넘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던 것이 합격이라는 결과를 안겨준 것이었다.

어렵게 합격한 파독 광부들은 3년을 약정하고 출국했다. 그러나 1년도 안 돼서 중도 귀국하거나 제3국으로 떠나는 사람도 많았다. 오 씨는 “2년 지날 때쯤에는 대학 나온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은 캐나다로 미국으로 가 버려서 남은 사람이 절반도 안 됐어요.”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오 씨라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나만 잘 사면 뭐하냐. 한국 가서 어머니 모시고 살겠다”는 각오로 3년을 꾹 버텼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오 씨는 3년 8개월을 하루 평균 16시간씩 석탄을 캤다. 그렇게 3년을 다 채운 사람이 142명 중 고작 7명이었다. 3년 약정 기간이 끝날 즈음, 독일 정부에서 성실근로자들에게 체류 연장 허가를 해 줬는데, 오 씨는 특별체류 허가를 받았다.
“3년간 병가 한 번 끊지 않고 개근한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딱 두 사람이었는데, ‘일하기 싫을 때까지 일해도 좋다’는 노동 허가 비자가 나왔어요. 그때만 해도 4~5년 더 일할 각오였죠. 그런데 74년 5월에 탄광사고로 한국 사람이 한 명 사망했어요. 가슴이 철렁하는데 나도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다들 말렸지만 간다 했어요.”
체류기간 연장을 받기 전까지 큰 사고를 경험하지 않았던 오 씨는 “우리가 지하 1천 미터 막장에 내려갈 때면 ‘글뤽 아우프(Glück auf)’라고 인사했어요.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에요. 매일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하면서도 두려움을 몰랐었는데 막상 옆에서 사람이 죽고 나니까, 그게 아니더라 말이에요. 그래도 악착같이 번 돈을 모아뒀으니 가도 되겠다 싶었지요.”
석탄가루 날리는 갱도에서 희미한 헬멧 램프가 가물가물해질 때마다 신을 의지하며 이를 악물었던 그의 귀국은 그렇게 급하게 다가왔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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