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로구 인사동은 내게 가장 소중한 배움터였다
우리 고유문화 더 없어지기 전에 그려라도 놓고 싶은...
눈이 안보일 때까지 붓을 놓지 않는 게 남은 삶 중 가장 큰 목표
봄 비 내리는 오후, 하얀 목련꽃이 핀 나무를 지나 골목 모퉁이를 돌아가니 특이한 식당이름이 눈에 띤다. ‘화가네식당’ 주인인 신창수(69) 씨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서 화가네식당이란다. 약속을 하고 방문한지라 자연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전화를 받고 서둘러 문을 열어주는 신 화백은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라 음식 준비에 집중하려고 문을 잠갔다”며 미안해했다.
식당 벽면마다 자리 잡은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출입구 오른쪽 벽에 걸린 할머니의 뒷모습 그림 앞에 섰다.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니 그림속의 주인공이 자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쓸쓸함․죽음 등 수많은 의미들을 품고 뒤돌아 앉아 말을 걸어오는 듯 했다.
신 화백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건 다섯 살 때부터라고 한다. “형제들이 모두 남다른 특기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림을 잘 그렸지” 하지만 엄하신 부모님은 환쟁이는 가난하게 산다며 종이를 사주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얼마나 그림을 그리고 싶던지 책상서랍을 열고 서랍 안쪽과 바닥에다 그림을 그렸다니까” 가장 아쉬움이 남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게 바로 그 책상이란다. “그 책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벌써 64년 전 일이니까” 당시 제법 큰 규모의 농지에 농사를 지으시던 부친은 농사일을 해야 한다며 완고하게 반대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가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던 신 화백은 직업을 13번이나 바꾸면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곁에 두었다고 했다.
신 화백에게 있어 유일한 스승은 2008년에 작고한 조성락 선생이었다. 평택인근에서 그림방면에 가장 뛰어났던 선생님 밑에서 반 년 정도 가르침을 받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신 화백에게 가장 소중한 배움터는 인사동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니 너무 배울게 많았다는 설명이다.
호박, 연탄, 고양이, 태양초 등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재들이 신 화백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이유를 묻자 “내 그림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우리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과 옛것들이 많다”며 우리 주위에서 옛것들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그 모습을 간직하려고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말이다. 앞으로 반세기만 더 지나면 전통문화가 다 없어질 것 같아 걱정이라며 “대한민국은 옛것을 없애는데 선수잖아, 우리 역사고 문화인데 그걸 파괴하는 게 안타까워서 없어지기 전에 그림으로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고 했어” 신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식당일에도 최선을 다한다며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그림을 그리는 게 힘은 들어도 마음이 편해 좋다고 한다.
“친구들은 날 부러워해. 내 나이 또래들은 밥 먹고 할 일이 없다는데 나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니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위해 내가 그림을 줄 수 있으니 더없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눈이 안보일 때까지 붓을 놓지 않는 게 남은 삶 중 가장 큰 목표”라며 그림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신 화백은 여주 목아박물관에서 최근 종료된 개인전을 비롯해 총 5회에 걸쳐 개인전시회를 열었으며 현재도 자신의 꿈을 위해 식당 옆 달산화실(達山畵室)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