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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올라온 부처님-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심복사는 뱃사람 안전과 풍어 기원하는 '민중의 안식처'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00.11.20 00:00

[평택시민신문]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7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신라하대 조성된 석불…화재로 바다에 잠긴 후
신라 명종 5년 어부들이 끌어 올려 심복사에 모셔



1.심복사 주변의 마을들

심복사는 현덕면 덕목리에 있다. 덕목리는 평택호 주변의 고등산 동북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고등산과 옆에 붙어있는 마안산은 100여 미터 내외의 작은 산이지만, 평지에 불쑥 솟은 지형 때문에 주변 경치가 잘 조망되고 제법 웅장한 산세를 자랑한다. 심복사를 아우르는 고등산, 마안산 주변의 마을들은 덕목리, 신왕리, 대안리이다. 심복사를 가기 전에 주변 마을들을 답사하고 고등산이나 마안산을 오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나는 심복사를 답사하기 전에 먼저 마을 답사에 나섰다. 마을 답사에서는 지명(地名)과 성씨(姓氏)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서점에서 구입한 1:50000지도와 경기도 박물관에서 작성한 평택시 문화유적지도를 보면서 마을과 지세를 살피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신왕리 마두(馬頭-말머리)마을을 지나 평택호를 바라보며 대안리의 자연마을인 태외, 뱀골, 소외를 지났다. 소외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오는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진성윤(69)이라고 자신을 밝힌 할아버지는 선조(先祖) 때부터 이 마을에 사셨던 토박이셨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도와 지명유래집으로 알고 있던 이 지역 마을에 관한 지식들이 상당부분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분에 의하면 태외, 소외마을은 마을에서 "큰박골", "작은박골"이라고 부르는데, 박골의 의미는 박씨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졌다고 하셨다. 또 큰박골 옆의 뱀골이라고도 하고 배골이라고도 하는 마을이름도 동네 사람들은 학동(學洞)이라고 불렀는데, 본래 이 마을에 서당이 있어서 "배움골"이라고 부르던 것을 소리나는 대로 부르면서 잘못 표기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행정구역으로 덕목4리는 옛 이름이 "광덕"으로, 고려 때 광덕현의 치소(治所)였다. 이 마을에는 4각으로 된 성터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덕목4리는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공민왕의 왕비)를 따라 중국으로부터 건너왔다는 곡부 공씨의 집성촌이다. 이들 마을들은 고려나 조선시대에 대부분 농업과 함께 어업에 종사했었다. 지금도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몇 있지만,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대부분 농업으로 전업하였다.

2.심복사 창건설화

심복사의 창건은 평택호 주변의 어업활동과 관련이 있다. 아산만은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천혜의 어장으로 이름났었다. 조선 전기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아산만에서 붕어, 게, 숭어, 웅어 등이 많이 잡힌다고 되어있는데, 해마다 봄, 가을 성어기(成魚期)가 되면 팔도의 고기잡이배들이 몰려들어 바다를 하얗게 뒤덮었다. 그래서 이 지역엔 어민들의 삶과 관련된 독특한 문화가 많다. 평택호 주변의 마을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당제(堂祭)나 뱃고사 등이 그것인데, 심복사, 신왕리사지, 백룡사지, 그리고 작은박골의 절터와 같은 절의 창건도 같은 경우에 속한다. 이 절들은 민중들의 생산활동과 관련되어 창건되었기 때문에 창건내력도 다분히 민중적이다. 그 가운데 심복사의 창건설화는 대표적이다. 1988년 평택군에서 편찬한 "우리고장의 얼"이란 책에는 심복사 창건설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선 명종5년(1549년) 파주 문산포에 사는 천을문이라는 어부가 같은 마을의 박씨, 문씨와 수원군 광덕면 덕목리 앞 바다에 고기잡이하러 왔다. 그런데 그물을 던져 올릴 때마다 큰 돌덩이가 걸려서 올라왔다. 다른 곳에 그물을 던져도 계속 돌덩이가 올라오자 이상하게 생각한 이들은 돌덩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돌덩이는 돌로 된 불상이었다. 평소 불심(佛心)이 지극했던 천을문은 부처님께 치성을 드리고 불상을 모실 곳을 고심하였다. 그 때 전날 밤의 꿈이 생각났다. 전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더니 "내가 머물 곳은 심복사다"라고 했던 것이다. 꿈속의 말에 따라 나루터에 내렸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상이 입을 열어 "나를 업고 심복사 터로 갈지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천을문은 용기를 내어서 불상을 업고 옛 절터가 있었던 광덕산(고등산) 기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현재의 절터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불상을 다시 업으려 하자 불상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곳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절터임을 직감한 천을문은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불상을 모셨다.
그러나 절을 세울 일이 큰 문제였다. 하루는 큰 풍랑이 일더니 그날 밤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내일 바닷가에 가면 임자 없는 소가 있을 것이니 파손된 배 조각을 가져다가 절을 짓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동트기를 기다려 천을문은 꿈에서 보았던 바닷가에 가보았다. 바닷가에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배 두 척이 파손되어 있었고 임자 없는 검은 소 두 마리가 노닐고 있었다.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소 등 위에 나무를 실어다 문씨, 박씨와 함께 절을 지었다. 절을 짓는데 큰공을 세웠던 검은 소는 절이 창건되자 갑자기 죽었다. 사람들은 보살이 절을 세우기 위하여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라고 하여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이 설화의 내용은 수록된 책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글학회에서 1986년에 편찬한 "한국지명총람"에는 검은 소가 세 마리였다고 되었으며, 다른 기록에는 천을문이 불상을 업은 것이 아니라, 임자 없는 검은 소가 수레에 싣고 갔으며, 절터에 이르자 소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 곳이 절터임을 깨닫고 절을 세웠다고 되어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불상을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는 점과 뱃사람 천을문이 창건하였다는 점은 모든 설화가 일치한다. 이처럼 심복사 창건설화는 한결같이 뱃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절이 창건되었음을 말해 준다. 창건된 후 심복사는 이후 뱃사람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예배처소였을 것이다. 때로는 뱃사람의 아내가 고기잡이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호소하는 장소였을 것이고, 만선의 기쁨을 부처님께 고하기 위하여 성대한 법회를 여는 곳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심복사는 민중의 꿈과 염원이 깃든 안식처였고, 이곳에 모셔진 부처님은 민중의 꿈과 희망을 대변하는 부처였다.

3.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바닷가에 절이 세워졌던 사례는 많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만 해도 배를 이용하여 중국을 오가거나, 화물을 운반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어서, 뱃사람들이 절을 짓고 치성을 드리거나 당제(堂祭)를 올리는 일은 일반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의 대당 교류의 창구였다고 추정되는 남양만에도 여러 개의 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며, 포승면 원정리 수도사와 관련된 원효의 전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반증한다. 또 조선 후기 작품인 심청전에서 심청이를 공양미 삼백석에 산 사람들은 당나라를 오가는 뱃사람들이었으며, 심청이를 제물로 바친 인당수도 당나라로 가는 뱃길이었다는 이야기도 뱃사람들의 종교적 행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의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심복사에 모셔진 불상도 바다에서 건져진 부처님이었다. 이 불상은 자애롭고 도톰한 얼굴에, 균형잡힌 몸매,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한 비로자나불인 점으로 미루어 신라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신라 하대에 조성된 이 불상이 바다 속에 잠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원인을 화재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왜냐하면 신라 말에서 고려 중기 사이에 창건되었고 불상이 본래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신왕리사지가 빈대가 많아 불을 질러 폐사(廢寺)시켰다는 전설이 있으며, 또 불상의 머리부분에서도 불에 그을린 흔적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불상은 절이 불에 타고, 폐사된 절터에서 굴러다니다가 해일이나 침식작용으로 바다에 잠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뱃사람들에 의해 바다에서 건져지고 심복사란 작은 절에 모셔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을의 심복사에는 따뜻한 가을 햇살만이 고즈넉하다. 심복사를 나오기 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다시 한 번 찾았다. 불에 그을린 불상이 어두운 법당에서 자애스럽게 웃고 있다. 부처님의 자비에 기대어 복을 빌던 무지렁이 어부들과, 그들의 아내와,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을 생각하며 법당을 나섰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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