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18세 강습소 선생님으로 가르친 건...

세상 살면서 누군가에게 더 잘 보이고, 자랑하겠다는 꾸밈이나 욕심 없이 속내를 털어놓는 어르신을 만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다. 그 속에 인생의 지혜가 있고, 진솔한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한성공회 팽성 성요한교회의 산 증인인 강태분(94,세례명 막달라 마리아)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 필담을 해야 하지만, 총기는 여전하다. 따님인 김명숙 이충중학교 교감이 종이에 크게 글자를 써서 보여주면 아흔 넘긴 나이에도 할머니는 글자를 가만히 살핀 후에 조곤조곤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할머니가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꾸밈이 없고, 종종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으로 듣는 이가 눈물이 날 만큼 큰 웃음을 안겨주기도 한다.

할머니는 팽성 교회 첫 신자였던 부모님 밑에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자랐다. 팽성 교회가 1906년에 세워졌으니까, 할머니는 교회 역사 그 자체인 셈이다. 일제 시대였지만, 유복한 가정환경 덕택에 당시 4년제였던 부용초(4회)를 졸업하고, 이어 성동학교에서 2년을 더 다니고 졸업(18회)했다. 지금도 일본목수들이 부용학교를 짓던 모습을 기억한다는 할머니는 17세에 교회가 세운 신명강습소에 입학했다. 신명강습소는 문맹퇴치와 계몽활동을 할 농촌지도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진 1년제 근대교육기관이었다.
강습소에서 뭘 배웠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오전에는 수신(도덕), 일본어, 조선어 이것저것 배우고, 오후엔 밖에 나가서 뭘 심는 실습한다고 하는데 심긴 뭘 심어. 노래 부르고 놀았어.” 옛날이나 오늘이나 학생들은 공부보다 노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할머니의 솔직함은 듣는 이를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소화14년(1939년)이었는가?
공출도 심하고 가뭄도 그렇게 심했어.
그때는 뻐꾸기가 그렇게 울데?

▲ 맨 왼쪽에 서있는 사람이 강태분 할머니

할머니가 강습소를 졸업하고 배치된 곳은 오성면이었다. 18세 새내기 강습소 선생님은 가가호호 방문하며 뭘 가르쳤을까? “가르치긴 뭘 가르쳐, 농사지어본 적이 없는데, 오히려 배웠지. 누에치는 것도 배우고, 디딜방아도 밟아보고, 빈대 때문에 밤에 잠잘 수가 없어, 그때가 소화14년(1939년)이었는가? 공출도 심하고 가뭄도 그렇게 심했어. 그때는 뻐꾸기가 그렇게 울데?”
전시체제 극심한 강제공출에 대가뭄까지 겹쳤던 시기를 회상하는 할머니 기억 속 뻐꾸기 울음소리는 식민지 교사의 서글픔을 부채질하고 있었을까?

‘선생이 오히려 배웠다’는 할머니는 “수신도 가르치고, 일본어도 가르치고, 한글도 가르치고. 그런데 순사들이 자꾸 와서 의심하고 추궁해. 뭘 가르쳤느냐고. 그러면 그냥 노래 불렀다고 했지”하며 씨익 웃는데, 영락없는 소녀다.

3년의 강습소 교사 생활을 재미있게 하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강화에서도 배 타고 들어가는 교동도로 가기 싫다는 딸을 시집보내 버린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시댁이 성공회 집안이고, 총각 또한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다. 시어머니는 개성 호수돈여고 출신의 신식교육을 받은 분인데도, 당시 시골서 큰 구경거리였던 굿판이 열리면 구경 다니기 좋아하고, 신랑은 저녁에 기도하자는 소리 한 번 안 하더라는 거다. 게다가 신랑은 마당에 곡식 널고 비가 내려도 움직이지 않는 양반이었다. 그래도 뒷날, 남편 김시메온은 뭍에서 학교 서무과장으로 일하며 팽성교회를 잘 섬겼다. 80년대 중반에 교인 감소로 교회가 없어질 형편일 때는 서울에 있는 주교를 만나 담판을 짓기도 할 만큼 교회에 열심이었고, 자녀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였다.

할머니는 팽성교회가 세운 신명강습소에서도 교사생활을 했었다. 당시 사진에는 개화리(현 송화1리), 원정리, 동창리 아이들이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단발머리를 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현대식 교육으로 문맹퇴치에 앞장섰던 할머니는 젊은 날을 자랑할 만도 한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모습이 생을 달관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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