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도 없이 총부터 맸어…”

중학교4학년 18세 나이에 대구에서 복무
생존 노병에 대한 예우 각별해지길
매년 6월이면 생각나는 한국전쟁 6·25, 올해로 발발한 지 벌써 64주년이다. 여전히 휴전이라는 세계 유일의 군사적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 대한민국,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국제정세 아래, 그 어느 때보다도 국가안보 강화와 확립이 절실한 때다. 알면서도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는 전쟁의 아픔과 희생자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6월의 어느 조용한 아침, 유치중 할아버지(82세,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평택시 지회장)와 함께 나눴다.
“정말 많이 죽었어. 꽃다운 어린 학생들... 북한군 피해 내려가고, 쫓아 올라가고 하면서. 그 때 뭘 알아? 나도 공부하다가 별안간 징집돼 대구로 내려가게 됐지. 당시 열여덟 살, 내 나이가. 그 때는 중학교가 5학년까지 있었거든. 난 중학교 4학년이었고. 대구로 내려가자마자 군번도 없이 총부터 매야 했어. 총이 뭔지, 탱크가 뭔지도 모르는데, 여기저기 대포소리 펑펑 터지고... 그야말로 머리 위가 마냥 하얗지”
자그마한 체구에 마른 몸매, 얼굴 가득 주름마다 새겨진 세월의 흔적, 기억 저편을 퍼 올리시는 유치중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젊은 시절 고왔을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현재, 평택에 생존하고 있는 6·25참전 노병용사들은 상이군, 무공수훈장 등 합해 총 1400여명이다. 제일 막내 나이가 82~83세, 90세가 넘은 노병들도 열 분 남짓 된다고.
“노환으로 여기저기가 아프지. 간간히 돌아가시는 분들 소식 들으면서, 마음 한 켠 무너지기도 하고, 전쟁을 치른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는 게 참 쉽지가 않아”
평생 뼈아픈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내 나라이기에 호국안보를 위한 염려와 걱정을 결코 놓을 수 없다는 유 할아버지. 6·25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임을 강조하신다.
“1945년 일제강점하에서 해방되고, 얼마 아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지. 이미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린 상태였고, 남한은 정부수립을 이유로 주한미군도 철수, 몇몇 고문관들만 남아있는 상태였어. 정치, 경제, 군사 등 정말 아무 것도 없는 불모 상태에 대한민국이란 이름만 붙은 거지. 1950년 6·25가 일어났을 당시 이미 북은 중국과 소련을 통해 엄청난 군사력을 확보한 상태고, 반면 우리 남한이 갖고 있었던 무기라고는 고장 난 총 몇 자루 뿐 이었어. 군복이라고 할 수도 없는 옷가지를 입고 주먹밥도 모자라 굶기를 밥 먹듯 했지. 이후, 유엔과 미국에 도움을 받아 마침내 1953년 휴전협정이 이뤄진 거야”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는 유치중 할아버지는 끝난 것도 아닌 휴전 상태가 1세기를 넘어오고 있는데다, 지금도 호시탐탐 제2의 6·25를 노리는 북의 도발이 끊이질 않고 있으며, 그것도 같은 민족 사이에 있는 일이니, 전 세계를 통틀어 이런 비통한 일이 대체 또 어디 있겠냐고 통분하신다.
“전쟁은 절대 안 돼. 뼈아픈 6·25를 스승 삼아, 수많은 젊은 희생영령들에 감사하며, 이들의 목숨과 바꾼 대한민국을 더욱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돼”
2013년 7월, 6·25참전용사들에 ‘호국영웅장’을 명명, 이들의 명예가 회복됐다. 또한, 3년 전부터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에서는 ‘6·25바로 알리기 교육’을 실시,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국가안보 의식과 호국정신을 함양하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해마다 6월이면 우리 옆구리를 찌르는 6·25! 희생자들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현재 생존하시며 전쟁의 살아있는 증인으로서의 든든한 역할을 다하고 계시는 참전노병들에 대한 예우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더욱 각별해져야 할 것이다. 참혹한 6·25 생존자, 참전노병들이 매달 받는 참전수당이 22만원(나라에서 17만원, 시에서 5만원)이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