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에게 듣는다 ⑫
협동조합을 통해‘우리 모두 행복한 세상’꿈꾸는 70대 청년
안중제일교회가 금융업 시작

[평택시민신문 허성수 기자] 안중읍사무소 근처에 35년 된 토종 금융기관이 있다. 안중제일신용협동조합은 1979년 4월 9일 설립됐다. 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 소속 안중제일교회가 사채를 쓰면서 고리대금 때문에 고통받는 지역주민들을 위해 낮은 이율로 돈을 빌려 쓸 수 있도록 서민금융기관을 만들었다. 초창기 이사로 참여했던 안중제일신협 황재순(74) 이사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전국에서 신협운동이 불이 붙기 시작할 때였어요. 성당과 교회에서도 신자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하면서 신협을 많이 만들었죠. 안중제일교회에서 31명의 조합원들이 58만7100원을 출자금으로 모아 안중제일신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를 향해 문을 활짝 열었다. 안중은 1일과 6일에 5일장이 섰다. 평택 서부 읍·면의 중심지로서 안중장이 서는 날은 활기가 살아났지만 고리채와 일수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 시름과 고통에 잠긴 이웃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고리채와 일수로 가정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교회가 해결사로 나섰죠. 저는 신협이 금융업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 생각했습니다.”
황 이사장은 실천적인 신앙으로서 사회의 약자들을 살리기 위해 신협에 참여했다. 그러나 설립한 뒤 2년 만인 1981년 안중을 떠나면서 오랜 공백기가 있었다. 고향에서 하던 의류판매사업이 어려워져 가족과 함께 이사간 곳이 부산이었다. 원래 그는 고향이 충청도였다. 바로 이웃한 충남 아산에서 1940년 태어나 1961년 안중으로 이주했다. 청년시절 20년간 살면서 일찍 교회 장로가 되고 신협도 만들며 정이 들었던 안중은 그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맺은 부산 인연
부산에서 그가 시작한 사업은 종교서적 도매상이었다. 서면로터리 근처 전포동에 CBS 건물의 사무실 한 칸을 얻어 기독교 전문서적을 할부판매하는 한편 사회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신군부가 철권통치를 하던 때여서 모든 국민들이 숨죽이고 있었지만 부산은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활화산과 같은 곳이었다. 부산의 재야인사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은 용기있게 나서서 민주화를 부르짖고 있었고 그도 조용히 사업만 하고 지낼 수는 없었다. 그가 소속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개신교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으로서 유신시절부터 야만적인 군사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오고 있었다.
“저는 부산에서 공해추방시민협회 부산지부 이사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거기서 고(故)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던 문재인 변호사, 김영삼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김광일 변호사와 같이 활동했지요.”
훗날 민주화를 성취한 후 그들이 대통령과 최고 지도자를 보좌하는 자리까지 올랐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남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해수부장관 시절 만났어요. 정장선 국회의원의 초청으로 평택을 방문하셨죠. 그것이 노 대통령과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황 이사장은 약 15년 전의 일을 기억하면서 재야시절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노 대통령을 그리워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3년 전에야 봉하마을을 다녀왔다.
세 자녀들 모두 거창고에 보낸 행운
“부산에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은 아이들 교육이었습니다.”
부산은 좋은 학교도 많고 대부분의 학교가 시골보다 훨씬 나은 교육환경과 시스템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학교는 부산에 있지 않았다.
“거창고등학교를 알게 됐어요. 저로서는 큰 행운이었죠.”
부산에서 한참 떨어진 경남 거창군, 깊은 산골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지만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음에도 황 이사장은 그 학교의 존재를 처음 듣고 나서 무릎을 쳤다고 한다.
“CBS 건물에서 사업할 때 옆 사무실에 선교단체 하나가 있었어요. 거창고 동문이 만든 단체였는데 하는 일과 생각이 너무 달랐어요.”
비록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더라도 어떤 자리에서든 최선을 다해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거창고 졸업생들을 보고 자신의 자녀들도 그렇게 교육시키고 싶었다.
“우리 큰 아이가 동래여중을 다녔는데 공부를 잘 했어요. 3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진학지도 면담을 하면서 아이를 거고에 보내겠다고 했더니 교사가 정색을 하며 ‘참 아버님도 다른 사람은 교육을 시키러 도시로 보내는데 왜 시골로 보냅니까? 동래여고에 보내야 서울대도 갈 수 있어요’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서울대보다 못한 대학을 보내더라도 거창고에 보내겠습니다. 사춘기 시절 가을밤의 별도 보지 못하고 공부만 하는 게 인간입니까?’ 하고 대답했죠.”
자녀들에게 강요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세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방학 때 거창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전성은 교장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학교를 직접 보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는데 결국 2녀1남 자녀들이 모두 거고 동문이 됐다.
“한 번은 노무현 변호사와 같이 울산에 다녀오는 차 안에서 거창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노 변호사는 듣고 나서 그런 학교가 있느냐고 하면서 자신도 아들을 거고에 보내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보낼 줄 알았는데 권 여사가 반대를 하셨는지 안 보내셨어요. 노건호가 우리 아들과 동갑내기인데 만일 거창고를 나왔다면 지금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거창고의 ‘직업선택의 십계명’을 소개하며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거창고 설립자 고(故) 전영창 선생이 만든 ‘직업선택의 십계명’은 출세지향적인 사회에서 부귀영화와 권세가 목표가 되고 있는 현실교육과는 정 다른 가치관을 제시한다.
①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②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③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④모든 조건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⑤앞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⑥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⑦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⑧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⑨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⑩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경남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명-
“제 생애에 거창고를 만난 것은 가장 좋은 추억입니다. 거고 같은 학교가 많이 생겨야 합니다. 평택에도 그런 학교가 세워져야 합니다.”
첫째 딸은 연세대 신학과를 나와 목회하고 있으며, 둘째 딸은 한신대 신학과를 나와 여목사가 되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셋째 아들은 화성두레팀장을 맡아 풍물패를 이끌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15년 만의 귀향 안중제일신협으로 복귀
부산에 사는 동안 거창고에 보낸 것만으로도 자녀교육은 만족했지만 사업은 점점 어려워졌다. 1995년 12월 사업을 정리하고 15년 만에 안중으로 돌아왔다.
“안중을 떠나기 전에 안중제일교회에서도 형편이 회복되면 오라고 했고, 재산이 정리가 안 된 것도 있어서 고향에 다시 오게 됐습니다.”
그 사이 안중읍이 커져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안중제일신협도 한층 더 성장한 모습으로 그를 반겼다.
“처음 3~4년간 쉬다가 2000년도에 신협 임원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때 실무책임자였던 친구가 서신성 전무였습니다. 서신성 전무와 신협의 5~7대 이사장을 맡고 59세에 소천한 정예진 장로, 저 이렇게 세 사람이 교회 친구였습니다. 서신성은 2008년부터 12대 이사장을 맡았다가 2011년 9월 간암으로 타계하면서 부이사장을 맡고 있던 제가 6개월간 직무대행을 거쳐 2012년 2월 정기총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됐지요.”
70대의 나이에 금융기관 대표를 맡아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신협이 협동조합인 만큼 무한경쟁하기 보다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우리 모두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요즘 그가 꾸고 있는 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