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도 마음은 부유하고 나눠줄 수 있어 행복한 노후 보내지요”

[평택시민신문 허성수 기자] 오성면에서 안중읍으로 가는 38번 국도 중간에서 청북면으로 빠지는 길을 따라 1km 쯤 가면 나사렛동산을 만날 수 있다. 춘분을 하루 앞둔 3월 20일 낮, 나사렛동산을 찾았다. 야트막한 야산의 언덕받이에 넓은 밭은 아직 황토빛이었다. 겨우내 얼었던 땅에서 얼굴을 내민 새싹들이 차가운 봄바람에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안중나사렛교회를 목회하고 나사렛대학교 총장을 지낸 이호정(75) 목사가 여생을 보내고 있는 곳이었다.

나사렛동산에서 흙과 함께 하는 여유

이호정 목사

넓은 밭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3층짜리 작은 아파트 2동이 마치 정물화처럼 세워져 있고, 입구에 조그마한 예배당도 있다. 바로 나사렛동산이다. 기자는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호정 목사를 따라 나사렛동산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집보다는 여기가 나아요. 20평짜리 교회인데 서울 벧엘중앙교회에서 노인들을 위해 작은 예배당을 지어주셨어요.”

나사렛동산은 한국나사렛교단에서 정년은퇴한 목회자들을 위한 노후 안식처였다. 모두 12세대가 살고 있다고 했다.

“모두 은퇴한 목사 부부들이어서 모이면 상담과 중보기도(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가 주로 하는 일이지요. 수요일 예배는 아예 중보기도 모임을 합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박옥경 사모가 다과와 과일을 가져왔다. 또 잠시 후 커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 목사는 부인이 밭에 나가 이웃집 농사일을 거들어주고 있는 중이라며 대견해 했다.

“집사람은 다른 사람 농사 도와주기도 하고 우리 농사도 지어요. 저보다 더 농사꾼이에요.”

소박한 작업복 차림의 부인은 농군의 아내 같았다. 비록 넥타이를 매고 있었지만 이 목사의 얼굴도 매우 밝고 환해 천진난만한 어린이 같기도 하고 예수님 같기도 한 성자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

목사였기 때문에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일찍 목사가 되어 성공한 목사였고, 대형교회를 목회하고 대학총장까지 지냈다. 조그마한 개척교회나 농어촌의 미자립교회 목회자와는 급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현역시절 넉넉한 대접과 널리 존경을 받는 자리에 줄곧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 쓰거나 모을 줄 몰랐다. 퇴직금도 장학금으로 나사렛대학교를 위해 내놓았고, 가진 땅도 복지시설에 기부했다.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는 아껴서 꼭 필요한 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남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돌봄선교회 색소폰과 시조시인

요즘도 그는 가난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풍요롭다. 작은 것이지만 나눠주려고 애쓴다.

“2년 전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나서 여기서 조용하게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네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널 돌봤기 때문이 아니냐. 그러면 너도 남을 돌보면서 살아라’는 말씀이었죠. 그 다음날 아내에게 의논을 했더니 감동을 받더군요. 그래서 2013년 1월 ‘돌봄선교회’를 만들었는데, 대표는 나고 회원은 아내, 이렇게 두 사람입니다. 돌봄선교회는 어려운 개척교회를 방문,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개척교회에서 오라고 하든 안 하든 가면 일체 사례를 거절하고 제가 도리어 봉투를 주고 옵니다. 절대 대접하는 문제로 신경을 쓰지 말도록 당부합니다.”

이 목사는 굳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면 라면을 끓이라고 한다며 티끌만큼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헌금은 제 개인 이름이 아니라 돌봄선교회의 이름으로 합니다. 개인이 주는 것과 조직이 주는 것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돌봄선교회는 아내와 저, 둘밖에 없지만 우리가 가진 적은 물질이라도 베푸니까 누군가가 다 채워주더군요. 동기와 목적이 선한 일에 열정까지 보탠다면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간혹 교인이 없다고 방문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며 반대하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 목사는 교인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며 가난한 목사를 설득한다. 설교하기 전에는 반드시 색소폰으로 직접 연주를 한다. 배운지가 6년이나 됐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서는 색소폰이 최고여서 은퇴하기 전부터 배우고 싶었죠. 저는 말을 잘 할 줄 몰라 악기를 통해 표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죠.”

그는 65살에 은퇴하고 바로 배우려고 했으나 차질이 생겼다. 아내와 하나뿐인 딸이 건강에 안 좋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두 여성의 반대로 5년 더 늦은 70살에 색소폰을 배우게 됐어요. 막상 형편이 되지 않아 색소폰을 두 개 가진 사람한테 소리가 잘 안 나는 악기를 빌려달라고 전화를 했더니 처음에는 악기를 함부로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며 거절하더군요. 그런데 잠시 후 그 사람한테서 빌려 주느니 아예 그냥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때가 5년 전의 일입니다.”

그는 처음 6개월 동안 안중교회의 한 청년에게서 1주일에 1시간씩 운지법을 배웠다. 그 후에는 학원 한 번 가지 않고 혼자서 악기와 씨름하면서 연주법을 터득했다. 지금은 확실히 아는 곡은 다 연주한다고. 날씨가 좋은 날은 나사렛동산 예배당 앞 나무 그늘 아래 데크에서 색소폰을 연습한다. 그러면 새들도 나뭇가지에 날아와 같이 노래를 한다. 나사렛동산에 날아오는 새들은 수준이 꽤 높다고 웃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집도 두 권이나 낸 시조시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연말 펴낸 시조집 ‘낮추니 아름답고 비우니 행복하네’(보이스사)는 불과 3개월 만에 다 나가고 올해 2월 2쇄를 찍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욕심 없이 낮은 곳에서 흙과 함께 보내는 노후의 삶을 통해 얻은 진실한 믿음과 순박한 마음이 정형시로 잘 표현돼 호평을 받고 있다.

1991년 나사렛대학교 교장에서 1996년 초대총장 맡아

이 목사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안중나사렛교회를 목회하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이 기간 비록 4년에 불과하지만 그의 목회인생에서 가장 꽃을 피웠던 시기 이후 갑자기 대학 행정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1954년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나사렛대학교는 이호정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한 1991년 10월, 그때만 해도 정규대학이 아니었다. ‘한국나사렛신학교’로 문교부 4년제 학력인정 대학이었지만 학사학위를 줄 수 없는데다 신학과만 운영되고 있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1991년 12월 정규대학 인가를 받아냈다. 호칭도 교장에서 학장으로 불리워졌다가 재활선교학과를 비롯해 선교영어학과, 음악학과 등 다양한 학과를 개설, 규모를 점점 확대하면서 1996년 1월부터는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설립 초기부터 미국선교사가 교장을 줄곧 맡아왔던 나사렛대학교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었고, 정규대학 승격으로 초대학장을 맡았으며, 종합대학 승격까지 직접 이뤄내고 목격한 초대총장이기도 해 3가지 직책을 두루 거쳐 견고한 주춧돌을 놓은 대학 최고행정가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이런 거인이 20년 전의 일을 회고하는 말을 들어보면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저는 대학을 운영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목회자였지 교수 경력도 없었고 교수를 하기 위한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이제는 한국사람을 교장으로 모셔야 한다고 자꾸 데모를 하자 이사회가 5명의 한국인 후보자를 놓고 고민하다가 박사학위조차 없는 저를 택한 것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사회가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신을 더 적임자로 본 것 같다는 말로 설명했다. 결국 그는 그 이상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과거 아주 작은 보따리신학교에 불과했던 나사렛대학교는 오늘날 국내 최고의 기독교 종합대학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0년 전 이호정 목사가 눈물로 기도하면서 든든한 기초를 놓았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안중 초원교회 마지막으로 70세 정년을 5년 조기은퇴

1997년 3월 총장에서 물러난 그는 도시교회보다는 가장 어려운 초원교회를 택해 마지막 목회를 했다. 초원교회는 지금도 안중읍의 한적한 동네에 있는 전형적인 시골교회다. 나사렛대학교에서 6년간 교장과 총장을 지내고 물러나면서 선택한 목회 현장으로서는 그의 화려한 경력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기피하는 미자립 농촌교회를 택해 7년간 시무하면서 교회당 건축을 위해 1500평의 대지를 마련하는 등 든든한 기초를 다져놓았다. 교단 규정에 70세가 목사 정년이지만 그는 65세를 맞은 2005년 3월 1일 은퇴감사예배를 드렸다. 후임 목회자에게 예배당 건축을 맡겨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놓은 상태에서 욕심을 비우고 조기은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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