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에게 듣는다 ②
‘보수꼴통’들어도 웃어넘기는‘진(眞)보수’평생 반공 외골수
이번 주 평택시민신문 ‘어르신에게 듣는다’에서는 정진모(77)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평택시협의회 고문을 모셨다. 정 고문은 평택지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자로 소문나 있다.
□민주공화당 평택군당 참여 주역

정진모 고문은 기자를 만나자마자 고향부터 물었다. 이미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를 통해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며 기자가 대구라고 밝히니 정 고문은 군대생활을 한 곳이 대구와 진해였다며 친근감을 표시하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난 평택 토박이야. 제6대 평택고등학교 총동문회장을 했어. 평택권투회를 65년도에 창설했고, 국가대표를 많이 길렀지. 자유총연맹의 전신인 반공연맹 평택군지부 창설을 내가 했어. 성동초등학교 동문회 초대 부회장도 했지.”
정 고문은 자신의 이력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며 소개를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전력도 그는 거침없이 보태며 체육관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선출한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체육을 하다가 정치에 참여했어. 보수 중에도 진(眞) 보수지.”
그는 원래 경희대학교에서 체육학을 전공하고 권투지도자가 된다. 그러던 중 일찍 정치에 눈을 돌려 1964년 민주공화당 평택군당 창립에 참여해 감찰부장을 맡는다. 그때부터 그는 오로지 보수 우익의 노선을 걸어왔다. 민주공화당 이후에 그가 선택한 정당도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그리고 지금의 새누리당이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진보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정치구호나 행동에 맞서 몸을 아끼지 않고 던지며 앞장서 투쟁하기도 했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로부터 ‘보수꼴통’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졌다. 그렇게 불리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다.
“내가 박정희 장군이 혁명을 일으킬 때 혁명군인으로 참여했어. 대구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인데 갑자기 전 군에 비상이 걸려 우리도 출동명령을 받았지. 무장을 하고 도청에 진입했는데 혹시라도 공무원들이 동요할까봐 경계를 했지.”
그는 당시 장교가 아닌 사병이었다. 병역의 의무를 위해 근무하는 군인으로 명령에 따라 혁명군이 됐을 뿐이었으나 정작 성공적으로 작전이 끝나고 박정희 대통령시대가 열린 것에 대해 그의 평가는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기자가 군인이 민간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정권을 잡은 것은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없이 살적에 혁명을 안 했으면 여기까지 못 왔어. 그 양반(박정희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으로 조국을 근대화시켰어.”
□박정희 대통령 덕에 평택 상습 물난리 면해
정 고문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다져놓은 근대화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면서 혁명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역사에 가정법 과거는 필요 없지만, 무능한 민간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혁명이 필요했다는 논리를 인정하더라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라를 안정시킨 후 다시 정권을 민간으로 이양하기로 한 약속을 저버린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정 고문은 이 질문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치를 안 한다고 하면서 번복을 했는데 박 전 대통령의 연임 결정은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평택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크게 고마워해야 돼. 과거 평택의 이 지역은 질어서 장화 없이는 못 다녔어. 바닷물이 들어오면 모두 뻘밭이 됐어. 박 대통령이 아산만을 막아주신 후에는 뻘이 영원히 없어졌지.”
정 고문은 지금 도심 주택가가 된 합정동의 옛 이름인 조개터의 내력을 설명하며 1973년 아산만방조제를 건설하기 전 어린 시절 추억을 들려줬다.
“조개터, 여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면 조개도 줍고 멱도 감았어. 그때는 다 논이었는데, 장화가 없이는 못 살았어. 그런데 아산만을 막은 후 평택시가 발전하기 시작했으니 평택시민들은 박 대통령에게 크게 고마워해야 돼. 그래서 내가 아산만에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우려고 추진하는 중인데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잖아. 모금을 해서 동상을 세우려고 계획 중이야.”
정 고문은 평택의 상습적인 물난리를 해결할 수 있도록 아산만 방조제를 건설하는데 간접적으로 기여한 인물로 평택 출신으로 경기도지사를 역임한 당시 김태경 대통령 비서관을 꼽았다. 김태경 비서관 역시 물난리를 겪고 있는 ‘배미’동네가 고향으로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건의한 결과 아산만방조제 공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태경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각하의 사인을 받아내고 현장에 모시고 와서 브리핑까지 했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으로 개헌하고 이를 반대한 사람들을 탄압한 일에 대해서도 정 고문은 관대했다.
“도리가 없잖아. 자기가 가던 길 가야할 것 아닌가. 그때의 상황은 유신을 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면서 그는 슬그머니 말문을 돌려 박 전 대통령이 핵무기를 만들다가 포기한 이야기를 했다.
“당시 미국의 카터 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걸려 못 만들고 말았지. 그때 우리가 먼저 만들었야 하는데, 그랬으면 평화통일이 이뤄졌을지도 몰라.”
□25년간 안보와 반공 민방위 정신교육 강사 노익장
지금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것과 비교하면서 미국의 반대로 핵무기 개발을 일찍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의 말은 우리가 북한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했더라면 북한이 위협을 느끼고 벌써 두 손을 들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배 고프던 시절 물배로 채우기도 했는데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나 변했잖아. 못 먹던 국민들 잘 먹게 만들어 준 것이 유신인데….”
그는 다시 유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현재 야당을 겨냥해 정치판에 대한 불만도 쏟아냈다.
“나도 여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야당이 지금처럼 하면 곤란해. 사사건건 야당이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잖아.”
정 고문은 1985년부터 25년간 민방위 정신교육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민방위가 1975년 월남이 월맹군에게 패망하면서 생겼어. 처음에는 정부에서 담당하던 교육을 1985년부터는 각 시·도가 맡아 교육을 시키기로 했지. 그때 내가 천안민방위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강사 교육을 받았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가 청와대 폭파를 위해 나타난 후 1968년 4월 1일자로 대전공설운동장에서 향토예비군이 창설될 때도 내가 기수를 맡아 대전에 내려갔어.”
그의 인생은 오로지 안보와 반공을 위한 헌신과 좌파에 맞선 투쟁으로 일관돼 있었다. 이 같은 노선을 선택하게 된 것은 5·16부터가 아니라 6·25로 거슬러 올라간다.
“형님이 국방경비대 1기생으로 헌병감실 특무상사로 근무했는데 6·25 전쟁 중 인민군에 납치된 미군 24사단장 딘 소장 구출작전에 투입됐어. 하지만 작전중 인민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지. 그래서 내가 반공을 하게 됐어.”
그의 부친도 대한청년단 평택읍단장을 지내는 등 일찍부터 우익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천석꾼의 아들이었던 아버지가 잘 살았기 때문에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고 나라와 고향 평택을 지키기 위한 봉사활동도 할 수 있었다고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은 웃었다.
□평택시100년 기념사업 반대
“2003년 K-55 정문에서 ‘주한미군 주둔환영 북핵저지’라고 혈서를 쓰며 시위한 적이 있어. 그런데 이 일이 한국 방송에서는 안 나가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에서는 나갔지. 평택은 미군 때문에 잘 살게 된 것을 시민들이 알아야 해.”
정 고문은 평택의 송탄과 팽성읍 안정리에 일찍부터 미군부대가 들어와 주둔하면서 경제적으로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한때 부국이었다가 빈국으로 전락한 필리핀을 예로 들었다.
“필리핀은 원래 우리나라보다 잘 살던 나라로 서울 장충체육관을 지어줬잖아. 그런데 필리핀에 클라크 미군기지가 있을 때 주민들이 매일 물러가라고 데모를 했어. 미국 국무부에서 클라크기지 사령관의 전화를 받고 미군을 모두 철수시켜 버렸지. 미군이 다 떠나고 나니 필리핀에서 사업하는 사람들도 안보가 불안하니까 다 떠나버렸어. 그래서 필리핀이 망한 거야.”
그는 용산 미군기지가 팽성읍에 새로 조성되고 있는 미군기지로 이전하는데 대해서도 반겼다.
“우리는 미군 없으면 자력으로 방위가 안돼. 북한이 6·25 때 미군이 떠난 사이 새벽 2~3시에 내려왔잖아.”
정 고문은 올해 평택시가 추진하고 있는 평택시100년 기념사업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했다. 일제시대에 행정구역이 강제로 조정된 것을 그대로 기준삼아 100주년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의 역사가 아니야. 나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평택시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
평택시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강제폐합에 따라 현재와 유사한 행정구역으로 재편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평택군은 충청남도에 속해 있었는데, 수원군의 16개 면과 그 밖에 이웃하고 있는 여러 군의 일부를 모아 경기도 진위군으로 병합하고, 진위군은 1938년 평택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평택이 빨리 커져서 인구 50만이 넘고 세 개의 구청도 생기면 좋겠어.”
시종일관 다소 투박하면서도 거침이 없고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로 인터뷰가 진행됐다. 아직 손주를 보지 못한 그가 뒤늦게 큰딸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44살의 선아 씨가 15일(수) 오후 5시 평택뉴코아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한두 해가 더 지나 팔순이 될 무렵 어눌한 발음으로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정 고문은 어린아이처럼 무척 설레인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