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에게 듣는다 ①
“단체장 17년 세월이라…고요한 공무원 사회 변혁 필요할 때”

유신정권 시절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고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년 넘게 투옥됐던 정수일(74) 씨, 그는 35년이 지난 후 2013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해 6월 14일 서울고등법원이 재심판결을 하면서 서울고등법원이 1977년 11월 3일 그에게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자격정지와 함께 1년 동안 징역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기자는 지난 3일 오후 평택시 현덕면 인광리 야트막한 동산 한 가운데 숲에 둘러싸인 그의 자택을 찾았다. 종교적인 개념은 예외가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국법에 의한 죄인 누명은 지난해 공식적으로 벗겨졌기 때문인지 흰 수염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해맑은 미소가 가득해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마치 무릉도원에서 만난 신선 느낌이 든다고 할까.
□답답한 세상 진보세력과도 껴안고 소통해야
먼저 6·4 지방선거에 관하여 화두를 던지자 “올해는 입을 닫고 살기로 했다”며 묵비권을 행사할 것처럼 피하는 체하다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유권자들이 아무나 찍으면 안 됩니다. 잘못 선택을 하면 시민이 고생하고 평택시가 망합니다. 유권자가 주인의식을 갖고 투표해야 하는데 종의 의식을 갖고 투표를 해요. 그러니 평택이 보수꼴통 지역이 돼 버렸어요.”
그가 갑자기 ‘보수꼴통론’을 제기했다.
“나는 보수도 필요하고 진보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평택은 진보세력을 죄다 좌경이니 용공주의로 몰아붙이고 있어 지역발전이 될 수 없습니다. 해방 전후에는 좌우익이 싸웠으나 지금은 그렇게 싸우면 안돼요. 나는 보수세력이 따뜻한 가슴으로 진보세력을 껴안고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을 안 하면 세상이 굳어지고 화합할 수가 없어요, 다수의 보수세력이 소수의 진보세력과 소통하는 평택이 돼야 합니다. 보수도 진보도 나라 걱정하고 지역발전에 대해 고민합니다. 둘이 서로 소통하고 양보하면 지역이 힘차게 발전할 것입니다.”
기자가 그에게 선거에 출마할 생각은 없는지 묻자 선문답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나 자신에 대해 정립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립이 되면 마지막 길을 갈 수 있는 대안을 만들어 평택을 휘젓고 다닐 것입니다. 평택 같이 어두운 지역에 반딧불이 같은 역할을 하겠습니다.”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그가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된 이석기 국회의원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다.
“이석기 의원이 북한을 대변하는 행동을 했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고 자세한 내용은 자료가 없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언론을 통해 드러난 사실을 보면 상당한 의혹이 있는 것 같다며 이 의원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분단국가를 위한 진보정치를 하려면 한국을 위해 해야지 북한을 위해 하면 안 됩니다. 이석기 의원 때문에 겨우 싹튼 진보정치가 앞으로 많은 제약을 받게 됐어요.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혹은 NL(민족해방노선)을 주장하며 적화통일을 하자는 것은 진보정치가 아닙니다.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위해 보수와 경쟁하는 진보, 국민을 잘 살리는 경쟁을 진보는 해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선거를 통해 유권자가 선택하는 정치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안철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와 실망도
그런데 그는 민주당도 새누리당과 같이 보수정당으로 분류했다.
“현재 민주당은 진보도 보수도 아닙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민주당을 보수로 봅니다. 같은 보수(새누리당과 민주당)끼리 무슨 정책대결을 합니까.”
대안세력으로 떠오른 안철수 신당에 대해서도 그의 평가는 인색했다. 그러나 국민이 기성 정당에 식상했기 때문에 안철수 의원에게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안철수 의원이 어떤 정치를 지향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국민들은 양대 정당보다는 잘 할 것이라고 기대를 거는 것 같습니다. 나는 안철수가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닌 중도로 봅니다. 새누리당에서 식상한 사람이 중도로 갈 수 있고 민주당에서 식상한 사람이 중도로 갈 수 있습니다. 또 진보에 식상한 사람도 중도로 갈 수 있습니다. 안철수 신당이 아마 6월 지방선거에서 상당한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봅니다. 민주당이 야당다운 야당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는 안철수 바람을 예견하면서도 여전히 정치인으로서의 안철수를 냉혹하게 비판했다.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의원에게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잘못된 것은 책임질 줄 아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런 책임감 없이 정치하면 정치가 아닙니다. 안 의원이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태도를 보인 것이 아쉽습니다. 문재인 후보로 단일화를 해주고 싶었다면 꼭 해줬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후보 사퇴를 하고 미국으로 내뺐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로서 정치인으로서의 처신이 아닙니다. 후보 사퇴를 하면서 문재인 후보의 손을 직접 들어주지는 않았다고 해도 승리하든 실패하든 선거 끝까지 지켜봤어야 했습니다.”
또 현재 그가 창당할 신당에 대해 민주당보다 많은 지지를 얻고 있지만 정책을 제대로 밝힌 적이 없다는 점도 질타했다.
“지금까지 국민을 위한 정책이 나온 것이 없어요. 정치적인 브레인이 부족하다고 보는데 지금 각 시·도지사 출마예상자들로 창당준비위원회를 꾸려가고 있어요. 그것은 새 정치가 아닙니다.”
□민주당 김선기 시장은 불출마가 바람직
그는 평택시장 선거로 화제를 바꿨다. 현재 자천타천 거론되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 여야 유력한 후보를 한 사람씩 꼽으며 그에 따른 문제점이나 예상되는 상황을 예언자처럼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평택시의 입장에서 여당 역할을 하고 있는 민주당의 유력한 후보로 김선기 현 시장을 꼽았다. 현역으로서의 프리미엄을 갖고 있는 김선기 시장의 공천이 유력한 상황이라고 판단하면서도 그는 “노!”라고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김선기 시장은 민선 4선에 관선 평택군수까지 합하면 총 5회를 했습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다시 시장으로 복귀하면서 3선 연임제한에 걸리지 않고 올해 선거에도 나갈 수 있게 됐지요. 하지만 17년 동안 평택을 움직여 오면서 행정가로서는 인정할 수 있으나 지방정부 운영자로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도대체 17~18년 동안 뭘 했습니까? 평택 서부지역만 보더라도 75~76년도에 평택호가 국민관광단지로 지정을 받았지만 이날까지 화장실 몇 개 짓고 미술관, 소리터 지은 것 밖에 없습니다. 입으로만 세계적인 관광단지를 만든다고 했으나 한 게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주민들 사이에 많이 깔려 있어요. 또 김선기 시장이 17년이나 하니까 공무원들이 시장 얼굴만 쳐다볼 뿐 시민을 위한 시정을 안 합니다. 인사이동을 1년에 댓 번씩 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공무원이 잘못 보였다가 좌천되니 시장 얼굴만 바라볼 뿐 시민을 위한 행정을 안 합니다.”
그 밖에도 김 시장이 북부지역에 브레인시티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불만이 상당히 많아 연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지적했다. 또 정수일 씨는 김 시장이 출마할 때마다 정당이 달랐던 것도 문제를 삼았다. 심지어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장기집권과 비유하면서 정체된 공무원 사회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라도 민선 5기로 시장직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서로 협력하는 능력있는 원로 정치인도 필요
새누리당에서 거론되고 있는 여러 시장 예비후보들 중 정 씨는 장호철 도의회 부의장을 특별히 주목했다. 장 의원이 3선 도의원으로서 풍부한 경륜을 갖추고 있는 데다 같은 지역구의 원유철(평택갑)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경기도지사 후보로 공천을 받게 되면 평택 발전을 위해 금상첨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었다. 두 사람이 도지사와 시장으로 러닝메이트를 이뤄 나란히 출마하게 되면 평택시민들이 도와 시의 공조가 잘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다른 당보다 더 지지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정수일 씨는 너무 오랫동안 1인 단체장 밑에서 정체된 공직사회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중앙정치 무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풍부하게 경험을 쌓고 카리스마도 강한 원로 정치인이 시장이 되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노승환 선배가 84세에 정치를 그만 한다고 선포하고 지역 유권자들에게 마지막 봉사를 하겠다며 구청장에 출마한 적이 있어요. 그 분이 당선된 뒤 그 지역을 많이 발전시켜줬지요.”
그런 선례가 있는 만큼 그는 평택에도 한 번 쯤 거쳐야 할 과도기에 힘 있는 원로정치인이 와서 묵은때를 깨끗이 청소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때 평택을 기반으로 삼아 중앙 정치권을 풍미한 여러 원로정치인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꼽으며 추천한 인물은 관선시장을 지낸 최종구 전 평택시장이었다.
“최종구 전 시장은 원리원칙주의자였습니다. 경기도에서 행정가로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83세로 정정합니다. 평택시를 뒤집을 사람은 그 분밖에 없습니다.”
현덕면 산꼭대기 외딴집, 자료로 꽉찬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창 밖에는 소리 없이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고 수긍할 수 없는 부분도 많겠지만 6·4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