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항성이 포승면에 있다면 원효 득도 장소 일수도

평택의 문화와 역사기행-8

김해규 한광여고 교사


민중들의 땅 포승면

포승면은 평택지방에서도 북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면(面)이다. 지금은 만호리, 원정리, 홍원리 등 9개 동리(洞里)를 아우르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직산현, 수원부 등 3개 행정구역의 관할 아래 나뉘어져 있었다. 그 후 조선 말 갑오개혁 때(1895년) 수원군으로 통합하여 포내면과 승량동면으로 불렸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포내면의 포(浦)자와 승량동면의 승(升)자를 합하여 포승면이라는 오늘의 이름이 생겼다. 본래 수원부의 관할이었던 포내면 지역은 고려 때 포내미부곡(浦內彌部曲)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향, 소 부곡은 고대와 중세시기의 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행정구역인데, 포승면에 향(鄕), 소(所) 부곡(部曲)이 있었다는 것은 이 지역이 통치기구의 변방이었고 민중들의 땅이었음을 의미한다.

포승면은 지형적으로 서쪽으로는 서해(西海) 북쪽으로는 남양만을 끼고 있어서 해안선이 복잡하고 갯벌이 발달하였다. 조선대 포승면을 지칭했던 포내(浦內), 외야곶(串), 괴태길곶(串)이라는 지명도, 복잡한 해안선과 포(浦)가 발달한 지형적 특징을 말해준다. 그래서 포승면은 간척사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조선 전기만 해도 가늘고 꼬불꼬불한 반도와 내륙 깊숙하게 들어온 갯벌 그리고 나루(浦)가 조화를 이룬 전형적인 어촌지역이었다. 16세기 전반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양성현 승량동면에 대한 설명에도 "현(縣) 서쪽 1백리 지점에 있는데 줄 같은 한 가닥 길이 진위현의 송장(현 송탄), 수원의 양간을 지나서 바다에 불쑥 들어갔다"고 되어있다. 그래서 포승지역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형적 이점과 개경이나 한양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말을 사육하거나 제주도의 말을 운반해와서 일정 기간 사육하는 목장(牧場)과 군사시설인 봉수(烽燧) 그리고 염전(鹽田)이 발달했었다.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홍원리, 원정리와 내기리로 추정되는 지역에 세 개의 목장이 설치되었으며, 원정 7리 뒷산에 해당되는 봉화재(봉우재)에 괴태길곶 봉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포승면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는데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남양만이다. 포승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남양만은 지금에는 평택시와 화성군을 구분하는 경계 이외에 큰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 그 옛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대당 교역의 중심도시로 알려져 있다. 역사학계에서 전라남도 영암과 더불어 대당교역의 중심이었던 당항성이 이 곳 남양만에 있었다는 설(說)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는 것도, 이곳의 지리적 위치 대문이다. 그래서 포승지역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도당(渡唐)유학생과 유학승 그리고 장사치들이 북적거렸고, 사찰이나 주막, 상점 등이 번창했을 것이다. 옛부터 평택지방에는 당나라로 유학가던 원효대사가 무덤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큰 도(道)를 깨우쳤다는 장소가 포승면의 수도사라는 전설이 있는데, 그 근거가 남양만이 대당교역의 근거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수도사의 위치와 원효대사 전설

수도사는 신라 문성왕 14년(852년)에 염거화상(평택시에서 간행한 여러 책에는 겸거대사라고 되어있는데 염거화상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온다. 염거화상(? - 844)은 신라 말 선종(禪宗)의 고승인 도의선사의 1대 제자로 선종 9산 중에서 가지산문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수도사는 창건 당시 대당교역의 중심지였던 남양만을 배경으로 번창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후 임진왜란을 전 후하여 폐사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수도사는 절 이름만 같을 뿐 본래의 위치가 아니다. 해방 후 작은 암자로 중건되면서 이름만 빌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999년 경기도 박물관에서 편찬한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에는 옛 절터의 위치가 LNG기지 안에 있으며 주추와 일부 석물들이 남아있다고 전하고 있으나 분명치 않다. 원정 1리에 사시며 평택농민회 회장을 역임하셨던 진장웅씨에 의하면, 어릴적 나무하러 봉우재(봉화재)에 많이 갔었는데 어른들이 봉수대 서남쪽 지역을 가리키며 옛 수도사 터라고 일러주었다고 하였다. 또 지난겨울에 수도사를 답사하면서 뵈었던 주지스님은 해군사령부 법사님이 해 주신 말이라며, 몇 년 전 해군 제2사령부 공사를 할 때 봉우재(봉화재) 서남쪽에서 불상과 주춧돌이 나왔는데 자신은 그곳이 수도사의 본래 위치같다고 증언하셨다. 위의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수도사는 분명 봉화산(봉우재) 주변 어느 곳에 존재했음이 분명하며, 여러 곳에서 절터가 발견되는데도 다들 그 절터가 수도사라고 믿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수도사가 봉화재 주변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도사에는 옛부터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617-646)가 무덤에서 자다가 밤중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은 장소였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여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다. 다만 이 사건으로 원효는 더럽고 깨끗한 것이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一切唯心造)이라는 큰 깨달음(大悟覺醒)을 얻고 도당(渡唐)유학을 포기했으며, 수행에 정진한 결과 큰 고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설화는 한국 토착불교의 터전을 닦은 원효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게 되었는지 그 일면을 보여 주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원효대사 설화의 장소가 수도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이 밝혀져야 한다. 먼저, 통일신라 전 후기 경주에서 당항성으로 가는 육로교통의 루트가 파악되어야 한다. 둘째, 통일 전 후기 당항성의 위치가 확실히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항성의 위치는 화성군 서신면이라는 학계의 주장이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주에서 당항성으로 가는 육로교통의 루트는 반드시 점검해봐야 할 내용이다. 왜냐하면 원효와 의상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당시 사람들이 당항성까지 갈 때 이용하던 최단거리의 대로(大路)를 이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원효와 의상이 도당유학을 감행했을 당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이어서 한강하류지역의 방비가 위태하였기 때문에, 역참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대로(大路)의 이용은 반드시 필요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신라에 역참(驛站)이 설치되고 관도(官道)가 정비된 것은 소지왕 9년(487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경주에서 대구를 거쳐 김천, 추풍령, 옥천, 청주로 이어지는 도로와, 통일 후 정비된 경주에서 대구, 청주(서원경), 당성진(당항성)으로 이어지는 길이 주목된다. 통일 전 백제도 수원, 천안, 차령, 공주방면으로 교통로를 정비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통일 후 신라도 서원경(청주)에서 천안, 수원으로 대로(大路)를 정비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이 맞다면 원효와 의상은 이 대로(大路)를 따라 당항성까지 갔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맞다면 수도사는 원효의 전설과 관련없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당항성이 화성군 서신면에 있는 한 굳이 직산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을 일부러 빙 돌아 포승면을 거쳐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포승면에서 당항성에 가려면 발안천을 건너기 위해서 원정리 부근에서 배를 타야 하는 번거러움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설화이다. 설화나 전설이라는 것이 과장되고 허무맹랑한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 내면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사실을 토대로 했거나 민중들의 강한 염원이 구전되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측면에서 수도사의 전설은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수도사와 원효대사의 전설이 사실에 근거했다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가능성은 하나이다. 예컨대 당항성의 위치가 화성군 서신면이 아니라, 평택시 포승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포승면에 통일신라의 대당교역의 근거였던 당항성이 있었다면, 원효와 의상은 서원경(청주)에서 천안으로 길을 잡아 직산을 거쳐 소사동, 칠원동, 장당동을 지나 포승으로 왔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 절을 돌아보았다. 절 마당에서 똥개 한 마리가 짖어대며 꼬리를 친다. 개들도 사람이 무척이나 그리웠던가 보다. 손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니 좋아하며 달려든다. 이 절이 옛 수도사 터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도 사람과 동물, 생명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안식처로 여긴다면 절의 역할은 다 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절을 나왔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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