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移設)위기에 내몰린 조광조·오달제 유허비(遺墟碑)의 향토사료적 가치를 생각한다.-2

1.조광조 오달제 유허비 소개
2.조광조 오달제와 송장(松莊)과의 관계
3.유허비의 향토사료적 고찰 및 가치 발현 방법(1)
4. 유허비의 가치발현을 위한 방법(2)
37년 짧은 생애, 행적 일화 거의없어
오달제 고향은 용인시 원삼면 학일리
비석 실은 황소 수레 정암 집터서 '요지부동'설도
2. 조 광조(1482~1519)와 송장과의 관련 자료 고찰
조 광조선생이 송장에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유허비 뿐만 아니라 진위현 읍지 헌종 9년(1843) 고종28년(1891)까지 인물조에 조정암이 송장면에 살았었고 지금은 그 선조의 묘가 있다고 기록돼 있으니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곳이 정암의 출생지인지 아니면 37년의 생애 중 어느 시기에 송장에서 살았는지를 알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아직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퇴계가 지은 정암의 행장(行狀)에는 7대조부터 가계(家系)를 기록한 다음 성종13년(1482) 임인(壬寅) 8월 10일에 한양에서 났다고 돼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은 행장(行狀)이나 다른 기록에 구체적인 출생지를 기록하기보다는 본관으로 출신을 밝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월탄 박 종화 선생) 출신가문이 신분결정의 절대조건이 되던 시대에 관행이었던 것이다.
정암이 5 살부터 놀고 장난하는 것이 이미 어른의 거동이나 도량과 같았고 비록 어른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꼭 일러 줘서 고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17세 때 부친이 어천찰방(魚川察訪)이 되어 임지(任地)에 따라가 있었는데 그 때 마침 김 굉필(金宏弼)이 희천(熙川)에 유배되어 있었기에 선생이 그 문하에 들어가 수학을 하게 됐다고 한다. 김 굉필이 동방성리학의 정통을 이어온 분이니 만큼 이 것이 선생으로 하여금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정암이 19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 용인 심곡(수지읍)에서 시묘(侍墓)를 살며 예법에 한치 어긋남이 없이 삼년상을 마친 후 묘 아래에 집을 짓고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수학에 전념했다 하며 선생의 나이 30이 되던 해 어머니 민씨가 돌아가 아버지 때와 같이 복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6살 이전 유소년기에는 일반적인 기초학문의 수학시기였다면 17세에서 34세가 되는 약 17 년 간은 정암이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자기사상을 정립하고 실천하기 위한 수행(修行)과 고뇌(苦惱)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출사(出仕)이후에는 지치(至治)주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훈구파의 저항에 부딪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지 능주에서 생을 마친 37년의 짧은 생애였다.
따라서 정암에 대한 기록에서 사생활에 대한 행적이나 일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송장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 단서가 아직 잡히지 않고 있다.
그 당시 명문가들이 서울과 향리에 모두 집을 가지고 가문의 근거지를 지키면서 출사에도 불편이 없게 살았던 것처럼 송장을 근거지로 해서 서울과 넘나들며 살지 않았을까 한다.
진위 읍지에 정암이 송장에 살았으며 선대의 묘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묘가 정암의 부모보다 윗대의 묘이니 만큼 송장이나 심곡(용인시 수지읍)이 한양조씨네 생활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심곡은 송장에서 진위 읍내를 거쳐 동탄 풍덕천(심곡) 과천 남태령 동작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들어가는 중간 쯤되는 길목인데 송장에서 80리 안팎의 거리이다.
아산시에는 구 온양현에 해당되는 곳에 정퇴서원(靜退書院-정암과 퇴계를 합사))가 있었고 아산현에는 인산서원(仁山書院)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송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다 정암을 모신 서원이 인접한 지역에 두 개가 있었던 이유 중에 혹시 정암의 생활 근거지었던 송장과 지연(地緣)이나 인맥(人脈) 또는 학통(學統)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었는지도 관심대상이다.
비문에 적힌대로 정암의 유허는 반지산 동쪽의 구릉형(丘陵型) 대지(臺地)위에 있다. 반지산은 표고 90m 밖에 안되지만 이 곳에 와 보면 누구나 눈길이 제일 먼저 가는 산이다. 둘레의 낮은 지형에서 불쑥 솟아오른 봉우리가 인상적이기 때문에 위치 표시의 기준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악산을 기준으로 볼 때는 불악산 주릉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온 지맥이 동령 마을을 감싸안고 부드럽게 반지산으로 이어진 대지 위가 정암의 유허다.
유허에서 남동쪽으로 퍼지며 기우는 대지가 끝나면 골아실 논을 건너 장안말을 감싸안은 낮은 구릉 줄기가 눈에 들어오고 그 저쪽으로는 몇 겹의 산과 들을 넘어 금북정맥이 장쾌하게 시야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북으로는 불악산의 능선이 든든하게 감싸주고 서북쪽은 성현(城峴)이 감싸고 있는 유허비에서 오 학사의 구거로 알려진 성현아래가 건너다 보였지만 10여 년 전부터 성현과 그 아래 농경지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시야를 처단하고 있다.
유허비의 위치는 유허(정암)의 중심부에 세워지기보다는 유허 중에서 길과 접한 한 지점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유허비 앞에 400평 남짓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고 동서로는 차가 다닐 만큼 큰길이 있고 남북으로는 농로로 쓰이던 길이 있다. 이 길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조시대 삼남대로 흰치고개(白峴)에서 아산만쪽 울성리 방시내와 안성천 건너 아산 당진으로 가는 길과 칠원(葛院)에서 황구지를 지나 남양만 쪽으로 나가는 지방도가 교차하는 길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이 곳이 송장부곡 시대부터 행정감무가 설치됐던 곳으로 국도와 연결되는 지방도로망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옛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3. 오 달제(1600~1637)와 송장과의 관련자료 고찰
오 학사의 구거(舊居)가 송장에 있지만 고향은 용인시 원삼면 학일리로 알려져 있다. 오 학사가 순절(殉節)한 해 봄에 고향에서는 풀이 모두 말라죽어서 지금도 고초골(枯草谷)이라고 부른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믿을만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오 학사의 묘(허리띠와 주머니를 묻은 묘)는 용인시 모현면에 있다. 그러면 송장 구거지에서는 오 학사의 36년 생애 중 어느 시기를 의탁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러나 오 학사도 정암선생과 같이 짧은 생애에 일신을 돌아볼 겨를 없이 치열한 삶을 살다간 분이기 때문에 두 분 모두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사생활에 대한 일화가 적다.
오 학사의 구거지는 유허비가 말하듯이 성현(城峴) 아래다. 성현은 불악산의 주릉 서쪽 끝-송탄출장소 뒷산-에서 남쪽방향으로 자세를 급히 낮추며 뻗어오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솟은 둥구재산 사이의 능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지금은 오 학사의 구거지로 일컬어지던 자리와 주변 일대는 도시개발로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 있어 원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제라도 위치를 고증해서 표석 하나쯤 세우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한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마을이 이충골(굴)이라는 자연부락이었는데 두 충신이 난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적상으로 이 지역이 이충동(二忠洞)이 된 것이 이 마을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 유허비에는 다음과 같이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얘기가 있다.
당초 유허비를 세우기로 했던 자리는 오 학사의 구거지(舊居地)였다. 터를 닦아놓고 비석을 실은 수레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수레가 도착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마을 장정들이 수레가 올 길을 따라가 보니 비석을 실은 수레가 지금 유허비가 서있는 정암의 집터에 달라붙은 듯 멈춰서 움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장정들이 몰려들어 밀고 당기며 황소에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움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한나절이나 실랑이를 하다가 할 수 없이 혼령들의 뜻인가 보다고 단념하고 지금의 위치에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두 곳의 유허를 하나의 비석으로 표시하려는 편이적 발상의 산물이다. 어차피 한쪽은 제자리에 비를 세울 수 없는 상황이니 자리를 양보하는 쪽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하고 서운한 마음도 달래주려는 속내가 드러나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이 유허비를 세울 때 위치 선정 과정에 설왕설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평택에는 구 평택현 지역인 팽성읍 본정리에 삼학사중 한 분인 홍익한(洪翼漢) 학사의 묘와 그 앞에 비각이 있는데 신도비와 자손의 비가 보관되어 있고 포의각(褒義閣)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원래 평택의 포의사(褒義祀)에는 삼학사를 합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일제 식민시대말 비행장건설공사 때 공사구역 내에서 옮겨지면서 오늘의 모습이 되지 않았나 한다.
홍 학사는 오 학사보다 14세가 위였다. 평택이 삼학사 중 두 분과 연을 맺은 충절의 고장임을 자부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유허비>
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