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식

중앙대 약대를 졸업하고, 장면 박사를 존경하며 언젠가는 장면 박사에 버금가는 인물이 되어보겠다던, 전도가 창창하고 의협심이 강했던 청년 서화택 회장께서 1965년, 삶의 첫발을 디딘 곳이 경기도 서남단 가장 끝자락의 크지 않았던 장터, 안중이었습니다.

필자의 지금 기억으로는 현대의원으로 기억되던 병원과 서약국이 서부지역주민들이 의지하던 의료시설이었습니다. 당시 약국이 개설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지역주민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약국 자리에 건물을 지어 당신의 천주교 세례명을 땋아 이름 지은 누까회관은, 약국이 몸의 병을 치료해주었던 것에 비한다면, 지역주민들의 찌든 마음을 위로해 주는 문화의 공간이자 어린이들의 꿈을 그리게 해준 희망의 공간이었습니다.

아산만과 남양만으로 둘러 싸여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었고, ‘장화 없이는 못 산다’던 질퍽한 곳에서 누까회관은 지역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외부에서 주최된 사생대회가 개최된 곳이자, 수백 수천의 젊은 남녀가 백년가약을 맺고, 지역의 크고 작고 문화행사를 치러내던 요람이었습니다. 1989년 평택농민회가 결성되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반세기 전에, 다른 곳에서는 아주 드물게 있을 수 있었던 일화의 주인공이 우리가 되게 해주신 것에 우리 모두가 가장 감사드리는 것은 ‘서 회장님’의 그 공덕이었습니다.

서화택 ‘회장님’은 개인적인 친목단체에서 안중로타리 클럽, 평택약사회, 평택테니스 클럽 등 공공단체의 회장, 그리고 선대에서 개척되어 평생을 몸담았던 안중천주교 성당의 여러 단체들을 이끌며 붙여진 평생의 호칭이셨습니다. ‘서 회장님’이 앞장서야 사람들이 모였고 단체가 운영되었기에 어려울 때마다 모셨던, 어느 직책을 맡아도 회장으로 불리셨던 우리 지역 모두의 영원한 회장이셨습니다. 그러나 서회장님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는 너무나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야당의 심각한 분열과 민한당의 몰락이 예견되던 시점에서의 첫 출마는 지역에서 유력 야당 후보들을 앞선 득표력과 민한당 후보가 출마한 전국 선거구 중에서 가장 높은 득표력을 얻음으로써 서회장님의 높은 대중적 신뢰를 보여주는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당선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후 평민당을 민주당으로 개편한 당시 김대중 총재께서 서회장님의 입당을 권하려 안중 지역을 두 번이나 방문하셨습니다. 지방선거가 계기가 되어 민주당에 입당해 입후보했던 두 번째 출마는 가장 유력한 기회였습니다. 3당 합당이후 첫 선거로 야당 단일 후보로 당시 신한국당 후보와 맞대결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에 가장 가슴 아팠을 분이야 물론 서회장님이셨겠지만 당시 선거를 총괄했던 저에게는 서회장님의 개인적 성공과 함께 3당 합당의 심판이라는 명분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잃은 안타까움에 지금도 가슴이 저립니다.

5, 6년이 지난 어느 날 서회장님이 저를 한번 부르셨지요. 담배 한 대만 달라고 하시며 친구의 아들인 저에게 같이 피우자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려워 하니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곤 5, 6년 전 ‘선거에서 자네가 하자는 대로 안 해서 내가 미련해보였지?’ 라고 하시길래 저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서회장님은 ‘한 번 생각해봐. 내가 미련한거야, 날 안 찍은 사람이 미련한거야?’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말씀을 가끔 생각합니다. 답이 뭔가 하고 말입니다. 그 말씀에는 평생을 자기보다는 이웃과 함께 살았다는 자부심과 선거결과에 대한,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서운함이 묻어나는 말씀이셨습니다.

평생을 천주교의 울타리에서 사셨던 서회장님은, 김수환 추기경님이 ‘바보’였다면, ‘미련’스러우셨습니다. 그래서 후덕하셨고, 누구하고나 친근하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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