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동(중앙동주민자치위원, 73세)

이충 택지개발로 현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예정인 정암 조광조와 삼학사 중의 한사람인 오달제의 유허비 이전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중앙동 주민자치위원회 등 주민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본보 153호 7면기사·이번호 1면기사 참조> 이러한 가운데 서정동에 거주하는 임석동(林錫東·73)씨가 이설(移設)을 반대하며 '조광조 오달제 유허비'의 향토사료적 가치 등을 밝히는 글을 기고해 왔다. 이에 본지는 향토문화유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 기고문을 4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1.조광조 오달제 유허비 소개
2.조광조 오달제와 송장(松莊)과의 관계
3.유허비의 향토사료적 고찰 및 가치 발현 방법(1)
4. 유허비의 가치발현을 위한 방법(2)
문화유적은 옮기는 즉시 '모형'으로 전락한다
이충동 충의각 택지개발에 밀려나선 안된다
지금 평택시 이충동 2지구 택지개발 사업을 앞두고 구역 내에 있는 조 광조 오 달제 유허비를 이설(移設)하게 된다는 말이 돌고 있다. 이제 송장부곡유지(松莊部曲遺址)의 지형지세(地形地勢)나마 볼 수 없게 된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며 유허비 일원을 돌아보기 위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동령마을 어귀에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택지개발구역내의 토지소유자들이 보상가의 재조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허비 이설에 대한 주민들의 의사표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설을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들어내 주장하기 위해 시간과 정력을 투자할 의욕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에 대한 답이 뻔한 것이라고 미리 체념하는데 길들여있는 우리들이니까.
문화유적이 희소한 평택에서 송장유지(松莊遺祉)에 있는 정암과 오학사 유허비는 향토 사료로 매우 가치있는 유적이라고 생각되는데 택지개발을 위해 제자리에서 쫓겨나게 됐다는 것이다.
'함께하고 나누는 복지·문화도시로 발전하는 평택' 이라는 시정지표를 무색하게 하는 이런 계획이 어떻게 확정될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했다.
이 일대는 송장부곡(松莊部曲)이 설치 됐던 곳으로 평택시 북동부 일원의 옛 지명이 송촌활달(松村活達)이었던 근거도 이곳 송장에서 찾아야한다. 이 곳은 유허비 뿐만 아니라 이 일대가 모두 보전할 가치가 있는 평택시 동북부의 유서 깊은 지역으로 택지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난개발 돼서는 안될 지역이다. 그렇지 않아도 평택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평원이다. 동북부의 산지와 기타 구릉지는 풍치지역(風致地域)으로 가꿔야할 대상이다. 반지산(盤芝山)을 반쪽이나마 살려낸 뜻을 안다면 유허비의 이설이라는 발상은 접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때야말로 관계기관의 높은 경륜과 미래지향적 발상과 투철하고 확고한 방향감각이 요구된다. 하찮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조 광조선생과 오 달제학사가 살던 옛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유허비를 택지확보를 위해 옮기려 하는 것은 두 분을 욕보이는 동시에 비를 세운 선대(先代)에 대한 불경(不敬)이다. 역사문화유적은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옮기는 즉시 그 것은 모형(模型)이다. 옮겨서 더욱 화려한 단청을 입힌 비각 속에 보존한다 해도 그것은 도리어 유허비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전문적 식견이 없는 내가 이 글을 쓰기까지는 망설임도 많았다. 용어나 조사 기록상의 정확성, 또는 논거(論據)의 불확실성과 독단성에 대해 많은 꾸지람이 있기를 바란다.
내 보이기에 너무 부족하지만 나의 유허비에 대한 소개가 향토사(鄕土史)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의 논의 자료가 되고 더 깊은 연구가 진행되는 실마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다.
1. 조광조·오달제 유허비 소개
가. 위치: 평택시 이충동 동령마을 서쪽 언덕
나. 재료: 비신(碑身)과 비부(碑趺) 모두 화강암
다. 크기
1) 비신
○ 높이 중심부: 120cm 좌우끝 115cm 비신의 상단 이마부분이 곡선으로 되어 중심부가 5cm 더 높다.
○ 폭: 상단 54cm 하단 49cm 시각적 효과를 배려한 듯 비신의 상단 나비가 하단보다 5cm 크다.
○ 두께: 12cm
2) 비부
○ 가로 70cm 세로 50cm 높이 약 15cm가 표토 위에 나온 상태. (묻힌 부분 미확인) 직육면체의 석재의 가운데를 파서 비신을 끼워서 세웠다.
라. 보존상태: 풍우에 시달려 200년을 지냈으나 전면의 각자(刻字)의 획은 훼손이 없다.
다만 비석 앞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 비석 머리에 얹히면 재수가 좋다는 속설 때문에 돌을 많이 맞은 흔적이 있다.
비부(碑趺)는 전면과 측면의 일부가 훼손돼서 비신이 앞으로 쓰러지게 된 것을 시멘트로 채운 상태이다.
50년대에 비각을 세워 충의각(忠義閣)이라 현판을 달았다.
마 .비문(碑文)
莊 松 ..............(전서체(篆書體 10 : 18) 가로쓰기
崇 吳 忠 趙 靜
禎 學 烈 先 庵
後 士 生 ............(해서체(楷書體 9 : 12) 세로쓰기
三 碑 之 墟 遺 ......( " ) 가로쓰기
庚 敬 瞻 城 盤
申 望 峴 芝
六 來 左 之 之
月 後 右 下 東
日 立 我 學 先
石 心 士 生
立 以 肅 舊 遺
書 如 居 墟 ....(해서체(楷書體 5:5 ) 세로쓰기
전면에 58자를 새겼는데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섞어 써서 처음 읽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에 가로쓰기로 전액(篆額 : 전자(篆字)로 쓴 비갈(碑碣)의 제액(題額)) '송장(松莊)' 두 자가 10cm 18cm 크기로 음각되어 고전미(古典味)를 풍긴다.
전액을 왜 이 곳 지명으로 했을까?
그것은 이 비가 유허비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허비는 어떤 터를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세우는 비석이다. 그러니 만큼 여기가 어디라는 것을 밝혀 두어야할 필요에서 이렇게 한 것으로 보고싶다.
송장은 당시 1800년대 이 지역의 공식 행정구획의 명칭이다. 1843년(헌종9년 계묘)에 발간한 진위현읍지(振威縣邑誌)에 따르면 송장면 현남 십오리(松莊面 縣南十五里)라고 기록 돼있으며 고적(古跡)조의 영신폐현(永新廢縣) 송장부곡(松莊部曲) 천장부곡(川場部曲)의 기록이 있다. 송장이 유서 깊은 고장인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75호라는 홋수는 13개 면 중 현내면 121호에 이어 가장 작은 수이다. 가장 홋수가 많은 여방면의 336호에 비하면 사분의 일도 안 되는 영세한 면이었다. 짐작컨대 부곡제도(部曲制度)가 잔존하던 시대로부터 뿌리깊은 행정구획의 명맥은 유지해왔지만 부곡제도가 풀어지면서 송장은 쇠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한다.
송장면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지금 살펴보더라도 특수기능을 수행하는 행정구획으로나 쓰일 곳이지 농경을 주로 하는 일반 행정감무를 설치하기에는 너무 척박(瘠薄)하고 궁벽(窮僻)지고 협소한 곳이다.
특수한 기능을 잃은 송장부곡 주민들이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면서 그들의 생업수단은 선택의 여지없이 대부분이 농경에 의존했을 것인데 송장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부곡시대의 주민을 모두 포용할 수 없음에 서서히 인구의 감소가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송장이라는 표제 아래에는 해서체 세로쓰기로 '정암(靜菴)' '조선생' '충렬(忠烈)' '오학사' 네 줄이 새겨져있다.
'정암 조선생'은 문정공(文正公) 조 광조(趙光祖). '충열 오학사'는 추담(秋潭) 오 달제(吳達濟)이다. 1482년과 1600년 118년의 사이를 두고 태어나 이조 선비의 최고봉의 반열에 오른 두 분이다. 그 아래 가로쓰기로 '유허지비'라고 이 비의 성격을 명확히 밝혔다. 집터를 오래오래 보전하여 사시던 분들의 큰 뜻을 기리고 따르기 위해 세운 비라는 뜻이다. 그 아래에는 좀 작은 해서체로 한 줄에 8 자씩 4 줄 32 자로 조 광조와 오 달제의 집터의 위치구분을 명확히 하고 추념의 뜻을 새겼다. 유허비가 많이 있지만 두 사람의 유허를 하나의 비석으로 표시한 예도 없거니와 횡서 종서를 번갈아 쓴 비문도 아주 희귀한 예이다.
盤芝之東先生遺墟(반지지동선생유허)
반지(盤芝)는 유허비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표고 90m 정도의 산 이름. 그러니까 선생(조 광조)의 옛터는 반지산 동쪽이라고 위치를 밝혀주고 있다.
城峴之下學士舊居(성현지하학사구거)
성현(城峴)은 송장의 주산(主山)격인 불악산(일명 부악산) 주릉(主陵)의 서쪽 끝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송장지역의 서쪽 울타리 구실을 하는 능선이 약 1km남쪽에서 90m 정도로 솟아오른 봉우리. 예부터 '둥구재'로 불리는 산 이름. 따라서 오 학사의 옛 집터는 성현 아래라는 것을 일러 주고 있다.
瞻望左右我心肅如(담망좌우아심숙여)
좌우(조 광조와 오 달제의 집터)를 우러러 보니 내 마음 숙연하네. 고절(高節)한 두 선비의 옛터를 바라보는 회포를 적음.
敬 來後立石以書(경심래후입석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장차 오게 될 후대를 위해 글을 새겨 비석을 세웁니다.
맨 왼쪽에는 세로로 숭정기원 후 삼년 경신 유월 입석(崇禎紀元後三庚申六月立石)이라고 비를 세운 날짜를 기록하였다. 이 것은 서기 1800 년으로 정조 24 년에 해당된다.
비음(碑陰)을 살펴보면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고 풍화작용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요철( 凹凸)이 보이는데 잔글씨를 얕게 각자해서 마모된 상태인지 육안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운 상태다.
<유허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