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글 사랑방

강 상 헌 논설주간. 우리글진흥원 원장

월드컵 4강 신화가 축구 붐을 몰고 오기 전까지 젊은 여성들에게 축구는 생뚱맞은 주제였다. 또 데이트 할 때 예의상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남자들의 군대 얘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군대서 축구 찬 얘기하는 사람’은 멋도 눈치도 없는 남자의 대명사 쯤으로 여겨졌다. 여성 축구 광(狂)팬까지 흔한 요즘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축구 찬다’는 말, 요즘 너무 흔하게 듣는다. 방송 중계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하는 이들이 많아지니 그 말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점점 줄어들 정도다. 축(蹴)자는 ‘발로 찬다’는 뜻, 구(球)는 공이다. 따라서 ‘축구 차다’는 ‘공을 차다’ 또는 ‘축구를 하다’로 바꿔 말해야 옳다.

“박지성 선수가 대(對) 리버풀 전(戰)에서 칼날 같은 슈팅을 잘 차서 골을 성공시켰다”고 한 해설가가 말했다. ‘슈팅을 차다’는 말도 같은 경우 아닐까? ‘공을 차다’는 뜻의 영어 단어 슈팅(shooting)은 ‘하는 것’이지 ‘차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슈팅이라는 외국어를 꼭 써야 할 만큼 우리말에는 적당한 단어가 없었을까? 

‘중국과 수교를 맺은지 20년이 됐다’ ‘한중 수교를 체결한지 20주년’이라는 일부 신문과 방송의 보도를 보며 ‘군대서 축구 찬 얘기’의 경우가 떠올랐다. 내로라하는 언론사의 기자들도 이젠 언어의 이런 불합리(不合理)를 자주 보여준다.

외교(外交) 관계를 맺은 것이 수교(修交)다. ‘계약이나 조약 따위를 공식적으로 맺다’는 뜻의 체결(締結)이란 단어까지 동원된 이 어법도 ‘수교를 맺은 것’과 함께 기본 수준 미달(未達)이다. 수교는 ‘하는 것’이지, 맺거나 체결하는 것이 아니다.

수(修)가 ‘맺다’는 뜻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에서처럼 자신을 ‘닦는다’[수신]는 뜻도 있고, 구두 수선(修繕)에서처럼 ‘고치고’ 깁는다는 뜻도 있지만 수교(修交)에서의 ‘수’의 쓰임새는 ‘엮어 만들다’ 즉 ‘맺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단어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뜻을 분명히 하면 말이나 글 실수를 덜 할 수 있다. 이를 ‘속뜻’이라고 한다.

‘수교 20주년(周年)’ 또는 ‘외교(관계)를 맺은 지 20년’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 쉬운 말로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물론 좋겠지만, 굳이 어려운 문자를 넣어 쓰고 싶다면 ‘외교(관계)를 체결한 지 20년’이라고 쓸 일이다. 20주년의 주(周)자는 1년을 단위(單位)로 하여 돌아오는 어떤 날을 세는 단위이다.

이 같은 뜻을 헤아리지 않고 낱말을 잘 못 사용하는 것을 널리 허용한다면, ‘외교관계를 끊었다’는 단교(斷交)를 문장에서 사용할 때 ‘단교를 끊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행히 여러 문장들을 검색해 보니 ‘단교를 끊었다’와 같이 쓰는 이는 없었다. ‘술을 끊다’는 단주(斷酒)라는 말을 쓰면서 ‘단주를 끊었다’고 할 사람도 물론 없겠다.

한글, 우리 말글을 사랑하고 갈고 닦는 것의 진정한 뜻을 다시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외국어 외래어만 덜 쓴다고 말글 사랑이 이뤄지는 것은 아닐 터다. 말과 글의 바탕이자 본디인 어법을 늘 생각하고, 그 쓰는 방법이 올바르도록 생활 속에서 자신의 언어를 닦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해법은 사전에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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