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 <본지 논설주간>

▲ 논설주간

그가 갔다. 남긴 슬픔마저 깨끗한 김근태의 떠남은 바로 역사의 한 대목이 됐다.
그 순수한 이의 뼛속까지 극한의 공포와 통증을 심은 ‘고문예술가’ 이근안을 떠올린다. 그 야만의 장면들, 치 떨지 않고 어찌 상상이나마 할 수 있으랴. 세밑의 분향소에서 수많은 이들과 함께 울었다. 조화 속 김근태의 웃음 띤 얼굴은 세상을 용서한 듯 했으나 나는 비로소 다시 원통했다.

전철 1호선 남영역을 지날 때마다 두 사람을 떠올렸다. 김근태와 박종철이다. 시야를 차단하기 위한 궁색한 담장, 음모와 협잡의 어둡고 습한 냄새 진하게 배어나는 풍경 너머에 그 건물이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린다. 서울 용산구 갈월동 88번지, 치안본부 대공보안분실이다.

박종철이 숨진 곳, 이근안에 의해 김근태가 ‘짐승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곳. 지금은 경찰청의 ‘인권센터’다. 이근안이 활약한 이 ‘고문의 성지’를 잉태한 이를 떠올린다. 이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겉모습부터 ‘사람 잡기 위한 쓸모’를 극대화한 건물이다. 실눈 뜬 것 같은, 좁고 긴 창문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존엄이 하릴없이 무너져 내린 현장이다. 보는 것만으로 등골이 오싹하다. 내가 김근태가 되고 박종철이 되어본다. 아프다. 다시 솟구치는 건 분노다.    

최근 이 건물을 톺아보고 그 ‘의미’를 속살까지 꼼꼼히 전해준 글과 사진이 있었다. 지난해 11월 6일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게재된 작가이자 연출가인 김상수 씨의 르포다. ‘인간이 만든 인간 도살장’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김수근이 과연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인가?…우리사회 문화적 미신(迷信)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그 글에서 몇 대목을 인용한다.

- 철문 안쪽 실내는 3평 남짓 원룸, 취조실 내부는 철망으로 채워진 전구와 형광등, 철제 가구들과 침대가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 감시와 취조, 고문이 목적인 이 공간에서는 전기 콘센트와 욕조가 고문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 고문의 효과를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세심하게 처리했음을 건축설계가 바로 입증하고 있다. 공간 전체가 인간의 의식과 의지를 무너뜨릴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폭력적인 건물구조 설계다.

- 끌려온 이들이 건물 공간으로 들어서면, 양팔을 포박당하거나 억센 손아귀에 이끌려 철제 계단을 오르거나 층 표시가 없는 승강기에 갇혀 5층으로 올라갔다. 길고 어두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어긋나게 배열된 철문들을 지나 칸칸 독방 철문으로 끌려들어 갔다.

- 철문들의 어긋난 배치는 혹시나 문이 열렸을 때 피의자들이 서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막기 위한 처리였다. 동시에 고문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정서적 돌연성을 엇각의 벽으로 마감해 공포를 극대화했다. 고문당하는 사람의 비명이 복도에 공명으로 울린다.

작가 김상수 씨는 이 건물을 ‘반 인권, 반 문명’적 대표 건축물로, 건축가 김수근의 정체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파악했다. 욕조와 침대, 길게 위 아래로 난 창들로 드는 광선 사이에 놓인 박종철의 영정이 놓인 사망 현장 사진은 작가의 통곡을 보듬었다. 김수근의 ‘작가정신’이 섬세하게 아로새겨진 기념비적 작품 아닌가. 글에서 그는 ‘건축에 있어서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또 김수근은 누구인지도 물었다.

이곳에서 김근태는 ‘인간’ 이근안에 의해 ‘짐승’이 됐다. 그 상처가 그를 죽였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이근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한 작가의 노기 가득한 시선이 붙든 ‘고문의 성지’와 그 작품을 일군 건축가를 떠올린다.

지하철을 타고 남영역을 지날 때 귀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폭행 전기고문 물고문 협박 등등 우리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그 지옥을 창조한 독재자들, 박정희 전두환 등과 그 하수인들, 이근안 김수근 등을 생각한다.

평화로운 남산을 배경으로 오늘도 그 ‘기념비’는 우뚝 서 있다. 살아생전 얼마나 아팠을까. 김근태가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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