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 <본지 논설주간>

▲ 논설주간

변변치 못한 데스크가 오자, 탈자, 문장부호만 챙기며 후배 닦달한다. 글의 전체적인 뜻이나 방향에 관해서는 별 생각 없다. 후배 기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실력 있고 배울만한 선배인지 이미 평가가 나 있다. ‘쪼잔하다’ 평 듣는 그 선배들, 셋 중 둘은 이 것 모른다.

필자도 경험으로 이런 정황을 알기에, 변변한 체 하기 위해서라도 남의 글을 볼 적엔 대범한 척 한다. 데스크는 언론사에서 기사를 모아 처리하는 자리나 담당 (고참)기자를 말한다. 게이트키핑(gatekeeping)의 현장, 세상 모든 이슈의 ‘문지기’니 중요한 자리다.

오늘은 변변찮은 기자로 스스로 망가지기로 했다. 이것만은 안 되겠다, 참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쪼잔하고 변변찮은 이 얘기를 들어주시기 바란다.

사례 하나, 어느 방송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미국 뉴욕의 무역센터 테러 10주년을 맞아 그날을 되새기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충격, 비통, 분노, 그리고 극복 등의 주제를 담은 화면과 발언들이 감동적이다. 당시 TV로 실시간 생생하게 그 테러를 목격한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화면 아래에 ‘부시 대통령은 그날을 국경일로 지정했습니다’라는 자막이 뜬다.
‘국경일’이라니! 나라의 경사스런 날, 기쁜 날이라고! 이미 세계사의 큰 제목이 된 ‘9.11’이 미국의 국경일(國慶日)로 지정됐다는 것이다. 부시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다. 얼핏 들린 해설자의 얘기는 그 부분이 영어로 ‘내셔널 데이(National Day)’였던 것 같다.

나라를 일본에 앗긴 우리 역사의 치욕스런 날을 국치일(國恥日)이라 한다. 경술년 한일병합조약 날인 1910년 8월29일이다. 6월6일 현충일은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 희생한 선열을 추도하는 엄숙한 날이다. 국가적인 기념일(記念日)들이다. 이런 날 중 기쁜 날이 국경일이다.  사례 둘, ‘北 붕괴設 폭로 200~300만 명이 주검으로’ 네이버에 한 방송사가 9월초 올린 뉴스 제목이다. 설(設), 건설(建設)처럼 ‘베풀다’ ‘세우다’는 뜻의 이 글자는 무슨 뜻으로 이 제목에 쓰였을까? 아마 북한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 붕괴 상황으로 파악해야 할 큰 일이 난다는 이야기[설(說)]를 말한 것이겠다. 說과 設이 다른 글자인지 모르는 것인가?  

사례 셋, 유명 언론사에 끼는 한 신문의 홈피에 5월초 뜬 ‘석학 스펙사회에 고(誥)하다’라는 제목. 독일 철학자 피히테(1762~1814)의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패러디한 것 같은 이 제목에 들어간 한자는 고(告)의 잘못이 아니었을까? 신문 관행으로 볼 때 쓰지 않아도 될 한자였다. 기자가 ‘좀 있어 보이려고’ 짐짓 멋을 낸 것 같은데, 스타일 구겼다.

이 誥자는 일반적인 ‘알리다’의 뜻이 아닌 일종의 용어(用語)다. 위(나라)에서 고시(告示)하거나 훈계(訓戒)하는 일, 옛 중국에서 고급 관리를 임명할 때 발행하는 인사 서류 등의 뜻이다.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자주 쓰이지 않는 글자다. 왜 이 기자가 이런 악수(惡手)를 선택해 스스로 지적의 대상이 됐을까 궁금하다.
사례 넷, ‘공수한다’는 말의 뜻이 항공(航空)으로 수송(輸送)한다 즉 비행기로 옮긴다는 뜻인지 모르고 기사에서 엉뚱하게 쓰는 기자들이 꽤 있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영등포 어느 음식점에 배추를 ‘공수’하는 신기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물론 이 단어는 옳게 쓰는 이가 더 많다.        

사례 다섯, ‘넓은 마음’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큰 도량(度量)’의 뜻 금도(襟度)를 ‘넘어서는 안 될 (도덕적, 인간적) 마지노 선(線)’ 쯤으로 잘 못 알고 ‘금도를 넘었다’와 같이 쓰는 ‘국어 미달(未達)이’ 블랙 코미디는 주로 언론인들의 머리에서 나온다. 어떤 기자는 친절하게도 괄호 안에 禁道라는 한중일 삼국에 없는 단어까지 써가며 여러 사람을 황당하게 한다.

사례 더 많다. 변변치 않은 고참 기자가 ‘요즘’ 기자들 글을 보면서 챙긴 이런 지적들, 역시 쪼잔하긴 하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구조적인 문제가 이런 현상을 부르고 있음을 눈치 있는 이들은 알게 됐으리라. 앞으로 더 나빠질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다. 우리의 소통 도구인 한글이 처한 상황의 한 단면이다.

왜 글을 밥벌이로 삼는 기자가 ‘만고(萬古)의 스승’인 사전을 섬기지 않을까? 또 어떻게 기자가 우리 말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한자의 존재를 모르거나 무시하고서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할까? 그 뱃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기자는 그렇다고 쳐도, 선배기자 데스크들은 하는 일이 뭔가? 대범하게 글의 전체적인 뜻이나 방향을 제시하느라 바쁜가?

무식해서 용감한가? 날마다 더 용감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본다. 허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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