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 <본지 논설주간>

글 쓰는 일이 ‘남의 글’을 베끼는 일로 차츰 바뀌고 있다. ‘자신의 글’을 스스로 쓸 수 있는 이가 드물어진다. 상당수의 학생과 젊은이들에게 이제 글쓰기는 ‘따붙이기’와 같은 뜻이다. 심지어 선생님과 엄마가 글쓰기를 가르친다며 따붙이기 요령을 전해주기까지 한다.
주제를 제시하고 이에 관한 글을 써오라는 숙제(대학에서 흔히 레포트라고 한다)를 내주면 학생들은 별로 당황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령 쪽지 시험 같은 형태로, 눈앞에서 (간단한) 글을 작성해 바로 제출하라고 하면 전혀 뜻밖의 반발이 터져 나온다.
글로 짓도록 하는 즉석 시험의 30% 쯤은 문장을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한다. 채점 가능한 수준은 20%가 될까 말까, 더 나빠져 간다. 중간시험, 기말시험도 마찬가지다.
제출되는 레포트는 장식 멋진 표지에 잘 편집된 소책자다. 그 사이에 언제 그렇게 연구하여 레포트를 잘 만들었을까? 학교에 따라 약간 다르긴 하나, 상당 부분 표절 아니면 부당(不當)한 ‘합동작업’에 의한 글이다. 죄의식도 거의 없다.
여러 학교에 오래 출강해온 경험으로 얻은 걱정이다. (어떤) 학교의 담당 부서에서는 ‘대충 학점을 줄 것’을 교수에게 요구한다. 자격 없는 이에게, 공부 안 한 이에게 ‘합격점’을 주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인터넷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 또한 ‘지적 훈련’ 즉 공부라는 것이다. 인터넷의 지식 바다에서 필요한 사항 건져내 해결책(답안 또는 숙제)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다. 딴은 그럴싸하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긁어모아 필요한 부분을 적당히 따서 붙이고는, 자기 글처럼 마무리하는 것이 따붙이기다. 스스로는 편법(便法)이라고 말하지만, 따져보면 ‘표절(剽竊)’이라는 엄연한 도적질이다. 문제가 된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더 문제일 수 있다. ‘들키지 않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생각이 이미 사회 전반에 똬리 틀었다.
믿고 싶진 않지만, 대학의 과제물은 물론 상당수 석박사 논문까지도 이 도적질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공무원이나 회사원들이 제출하는 보고서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해외출장복명서 즉 보고서가 인터넷 관광안내서 짜깁기나 어리숙한 기행문 편집본이더라는 얘기는 이미 익숙한 얘기다. 또 그걸 베낀 문서가 다음해에도 다시 돈다.
이런 어문 현상이 글의 뜻을 희미하게 한다. 낱말과 문장이 어울리지 못한다. 마침내 ‘글’이 우리의 뜻을 또렷하게 담지 못하는 상황이 오고 있다. 정치적으로, 장삿속으로 오염된 글들이 넘쳐난다. 좋은 글과 해로운 글을 구분하는 능력도 아울러 떨어진다. 그런 글이 우리의 생각하는 바를 온전히 보듬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엉터리 글들은 인터넷을 통해 다시 세상을 휘돈다. 망국의 조짐일 터다. 언어는 생각의 틀, 사회가 착하지 않게 바뀌는 것 같은 모양새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겠다.
이런 습성이 쌓이다보니 공적(公的)인 공간이건, 사적(私的)인 글쓰기건 구별 없이 비문(非文)과 와어(訛語)가 넘쳐난다. 너나없이 글쓰기가 두렵다. ‘나의 뜻’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간단한 능력’이 ‘특별한 재주’로 평가되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린 속내다. 글 쓰는 재주를 가진 이들이 ‘특권층’이 되는 세상이다.
성실한 생활인이나 연구자들의 귀한 경험, 그 사회의 총체적 지식 자산은 ‘단지 글 쓰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다. 남을 위해, 후손을 위해 정리되지 못하는 ‘지식활동의 불임(不姙)’은 실은 국가 경쟁력의 바로메타일 터다.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진지한 연구가 시급히 필요하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이든, 누구에게 책임이 있든지 간에, 이대로는 안 된다. 응급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중장기적인 대책도 꼭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글이 정직한 생활과 생각의 거울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본디는 기쁘고 아름다운 것이다. 또 어려워야 할 이유도 없다. 글쓰기가 특정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된다.
‘더 좋은 세상’을 짓기 위해, 이런 비리를 고치고자하는 사회의 뜻이 모아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누구나 즐겁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글로 옮겨 쓸 수 있는 그날을 앞당길 묘안이 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