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시인은 사과장수의 모습에서 인간 삶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시로 그려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사과장수가 사과를 팔고 있었다. 10개씩 쌓은 사과를 팔고 있는데 모두가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사과엔 흠집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사과의 흠집은 모두 사과에 붙은 상표 스티커가 가리고 있었다.
그렇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은 점과 함께 부족한 면을 가지고 있다. 부족한 모습은 가능한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좋은 모습은 과장해 드러내려 한다. 마치 사과장수처럼 우리는 부족한 모습은 가리고, 좋은 모습만 드러내려 한다.
이런 ‘나’에 대한 원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를 묻지 않으면 새롭게 거듭나기 힘들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영적인 전통과 형성적 전통에 뿌리를 둔 존재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인들만큼 영적인 민족도 드물다. 과거 우리 어머니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장독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를 했다. 한국인들은 이렇게 종교적 심성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는 종교적, 영적 전통이 강하다.
우리나라에 맨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고구려의 제17대 왕인 소수림왕 2년(372년)이다. 그 후에 384년(침류왕) 동진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했고, 신라의 불교는 5세기 초에 고구려에서 처음 전래 되어 왔지만 귀족들에게 배척을 받아 572년(법흥왕)에 이차돈의 순교 이후에야 나라의 공인을 받았다. 이후 한민족은 불교의 영적 전통 아래서 참으로 깊은 영적인 생활을 이어왔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교는 이제 200년을 갓 넘긴 막내 종교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전통의 영향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데레사, 프란치스코, 이냐시오, 아우구스티누스, 김수환 추기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불교 신자라면 서산, 사명대사, 법정 스님, 유교 신자라면 율곡과 퇴계, 정약용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유교와 불교, 그리스도교적 영향을 받았으며, 그 사회 역사적 전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