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영식 교장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

장터에서 사과 장수가 사과를 팔고 있었다. 쌓아놓은 사과는 모두 먹음직스러웠다. 사과엔 흠집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사과의 흠집은 모두 사과에 붙은 상표 스티커가 가리고 있었다.

그렇다. 사과 장수라면 누구나 자신이 팔려고 하는 사과의 흠집을 감추고 싶어한다. 남 말하며 흉볼 것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은 점과 함께 부족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족한 모습은 가능한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좋은 모습은 과장해 드러내려 한다. 마치 사과장수처럼 우리는 부족한 모습은 가리고, 좋은 모습만 드러내려 한다.

왜 그럴까. 나는 과연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길래 그럴까.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개념을 단순화하면 늘 무리가 따르지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간단히 정리하면 “인간은 영적이고 형성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인들만큼 영적인 민족도 드물다. 과거 우리의 어머니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장독 위에 정화수 떠 놓고 기도를 했다. 한국인들은 이렇게 종교적 심성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는 종교적, 영적 전통(Faith Tradition)이 강하다.

우리나라에 맨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고구려의 제17대 왕인 소수림왕 2년(372년)이다. 그 후에 384년(침류왕) 동진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했다. 신라 불교는 5세기 초에 고구려에서 처음 전래됐지만 귀족들에게 배척을 받아 572년(법흥왕)에 이차돈의 순교 이후에야 나라의 공인을 받았다. 이후 한민족은 불교의 영적 전통 아래서 참으로 깊은 영적인 생활을 이어왔다. 이에 비해 한국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는 이제 200년을 갓 넘긴 막내 종교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전통의 영향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데레사, 프란치스코, 이냐시오, 아우구스티누스, 김수환 추기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불교 신자라면 서산, 사명대사, 법정 스님의 영향에서, 유교 신자라면 율곡과 퇴계, 정약용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유교와 불교, 그리스도교적 영향을 받았으며, 그 사회 역사적 전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 전통 이외에도 우리는 많은 사회 역사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형성적 전통(Form Tradition)이다. 한민족을 형성시켜온 전통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가정의 영향, 가문의 영향,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다. 또 학교의 영향, 마을의 영향도 받았다. 어느 지역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 전통과 형성적 전통 속에서 성장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향들을 창조적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민주주의 하나만 봐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현존 최선의 제도지만, 그 자체는 늘 나에게 있어서 창조적으로 비판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 영혼에 생체기를 낼 정도의 무한 경쟁, 부익부빈익빈, 다수 의견이 가질 수 있는 폭력성 등은 창조적으로 비판되어야 한다. 이 비판 작업을 통해 나, 인간은 성장한다. 본래 가진 초월성을 구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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