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간단하다. 우리는 누구나 ‘초월’해 나가는 경향이 있다. 육상선수는 기록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음악가나 무용가는 새로운 창조를 위해 노력한다. 생물학자는 세포 속을 보려고, 또 천문학자는 우주를 멀리 보기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노력한다.

학생들도 공부를 잘하려고 노력한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학생도 본질적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려는 욕구가 있다.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

이것을 어렵게 표현하면 ‘인간은 초월적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더 나은 방향으로 초월하려는 것은 단순히 세상 속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밥을 더 많이 먹기 위해 하늘을 탐구하지 않는다. 인간 내면에 본래적으로 더 나은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가려는 욕구와 갈망이 담겨 있다. 학생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안타까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쨌든 인간은 이렇게 초월적으로 좀 더 높은 상태를 원하게 되어 있다.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미리 형성’(Pre-Formation)되어 있다.

찜질방에 가서 몸을 깨끗이 씻는다고 해서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강원랜드에 가서 대박을 터트리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도박에 빠진 사람들의 눈에는 힘이 없다. 차라리 눈이 없었다면 나쁜 것을 보지 않고, 육체가 없었다면 육체적 향락에 빠져들지 않았을 텐데 인간은 그 감각적인 것을 쫓아서 지금도 방황하고 있다.

뭔가 방향이 잘못 됐다.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 인간에게는 그럴 힘이 있다.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 인간다움의 아름다움이 있다.

육신, 정신, 마음의 삼중구조를 칭칭 둘러싸고 있는 오만 형태를 벗어 던져야 한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서 혹은 수련을 통해서, 좋은 만남과 좋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삶의 위장된 형태가’ 점점 작아지고 ‘초월성을 구현하는 삶의 형태’가 커지게 된다.

나의 중심에서부터 나의 힘을 키워야 한다. 기본을 잊어서 오만이 생기고, 위장된 삶의 형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본래의 나를 잃어버린다.

만약 지금 나를 둘러싼 주위에서 삐거덕 대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나 자신을 먼저 바로잡는다면 문제는 이미 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향기 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일 때, 향기 넘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내면을 보자. 그 내면 속에 위장된 삶의 형태가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아니면 진리의 삶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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