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 칼럼

우리글진흥원 원장
왜 트위터가 재벌가 사람들 잡담으로 시끄럽지? 채신머리없이 내로라하는 신문들까지도 ‘트위터에 누가 무슨 얘기를 했다네’ 하고 떠드는 모양새가 그다지 고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입담에 오르려고 트위터용 말장난으로 언론플레이를 벌이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단다. 이를 나름 마케팅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는 모양이다.
‘재벌 누구의 아들딸’ 아니었다면 우리 사회의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그렇고 그런 인물들이다. 이제 손자들도 ‘3세’라며 그 대열에 낀다. 부모 잘 만나 선망의 과녁이 된 이들의 잡담이 우리 사회의 아젠다(agenda) 즉 의제(議題)가 되는 ‘묘한 소통의 시대’다.
언론이 떠들어주니 지가 무슨 시대의 구원자, 예언자가 된 양 주제도 분수도 파악 안 된 ‘말씀’들을 자꾸만 쏟아놓는다. 또 신문에 난다. 공 던지면 얼른 물어오는 애완견 보는 기분일까? 민초(民草)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 세상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철없는 귀여움’도 어리석음과 함께 묻어있다.
몇 줄 안 쓰는 글인지라 논리고 맥락이고 책임이고 생각할 필요도 없나보다. 한 말씀 흘리면 언론은 침소봉대하고 미사여구 붙여 ‘해석’하고 ‘평가’해 준다. 재벌가 새로운 세대의 통큰 소통법이라는 근사한 의미까지 부여한다. 스마트폰이 만든 새로운 풍속도다. 언론은 덩달아 판을 벌였다.
지나고 보니 시민들만 하릴없이 농락당한 것이라는 느낌이다. 이러니 언론이 더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요즘은 페이스북까지 소통을 빙자한 이런 말장난에 휩쓸리는 것 같다.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런 프로그램들이 펼치는 혁혁한 역할과 고마운 기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째 우리나라 젊은 재벌 말씀 옮기기 경쟁은 참 시답잖다.
속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언론이 ‘그 젊은 사장님들’의 (트윗질) 발언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이유는 그들로부터 더 많은 귀여움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뜻의 각축(角逐)이다. 상대(언론사)들을 제치고 광고와 협찬을 얻어내기 위한 안간힘이다.
트위터는 이런 의도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연장이다. 이렇게라도 해서 재벌 사장님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것이다. 광고에, 그 재벌이 ‘베풀어주시는’ 돈에 언론(회사)의 존폐가 걸려있다니 욕하거나 비웃지는 못하겠으되, 적어도 이런 상황을 독자 여러분은 ‘알고는 계셔야 한다’는 충직한 귀띔이다.
마셜 맥루언이라는 캐나다의 언론학자가 50년쯤 전에 얘기한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명제는 참 시사적이다. 미디어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체다. 마사지(massage)는 안마(按摩)다, 손으로 누르고 어루만지는 행위다. 언론이 안마를 한다고?
다양하게 해석되고 활용되는 그 말, 요즘 더 실감난다. 오래 전 그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저 ‘비유적인 표현이려니’ 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에 새롭게 들어앉은 스마트폰과 그 물건의 특성을 잘 구현하는 트위터라는 프로그램이 ‘새로운 미디어’로 우리 생활을 주무르고 있는 모습은 놀랍다. 휴대 밀착 미디어라는 점도 그렇지만, 사용자가 다른 생각을 가질 여유를 주지 않고, 몰입하게 만든다는 점도 그렇다. 심지어 진동 기능으로 만져주기까지 한다, 이건 진짜 마사지다.
맥루언은 미디어를 ‘인간(감각기관)의 확장’이라고 했다. 귀나 입의 역할을 도와준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그는 미디어가 촉각(觸覺)을 자극하는 시스템으로, 안마까지 해 줄 것이라는 의미의 이 명제를 또 내놓은 것이다.
미디어는 메시지(message)다. 뜻을 담아 여러 사람이 공유하기 위한 그릇(도구)이다. 새로운 그릇이 자꾸 나오다보면 거기에 담기는 뜻도 그릇에 따라 달라진다. 디지털 시대가 오니 아날로그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콘텐츠가 생겨난다. ‘그릇’의 의미와 역할이 그 그릇에 담긴 내용물만큼 중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릇에 담긴 내용물, 콘텐츠다. 미디어가 안마까지 해준다며 그 신기함에만 빠져 있는 모양은 본말전도(本末顚倒)다. 본질과 뒤끝이 뒤바뀐 것이다. ‘달 보라 하니 손가락만 보더라’는 어떤 스님의 말씀도 있고, 영어로는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든다(wag the dog)’는 비유가 적절하겠다.
비유법이다. 날마다 새로 출시되는 그 ‘그릇들’의 사용설명서를 읽는데 우리는 모든 기력을 다 써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그 ‘스펙’을 잘 아는 것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양의 척도, 인간됨의 바로미터, 능력의 기준이 그 스펙의 활용인가? 재벌 2세 사장님들의 그 고견들이 기껏 그 콘텐츠인가?
스마트폰과 스마트폰을 구사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그릇일 뿐이다. 그 그릇에 더 좋은 내용을 담기 위한 새로운 노력은 어디에 있는가.
원불교 교리의 ‘물질이 개벽(開闢)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구절을 생각한다. 정신의 개벽이 따르지 못하는 물질의 개벽에 대한 오래된 경계(警戒)다. 개벽은 뒤집히듯 세상이 새로운 모습으로 열리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더 스마트한 기계로, 트위터는 다른 기발한 프로그램으로 곧 바뀔 것이다.
책 읽은 지 얼마나 됐지? ‘나’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 가다듬어 본 것은 언젠데? 어진 얼굴의 스마트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큰 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스마트폰에게 물어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