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 <본지 논설주간>

▲ 논설주간

대일본제국이란 말은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에게 익숙한 칭호다. 해방되던 날 태극기를 처음 보았고, 공식적으로는 우리말로 된 이름으로 처음 통성명(通姓名)을 했다는 그들의 의식구조에 새겨져 있을 상처의 깊이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대영제국(大英帝國)이란 말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들었다. 무력으로 세계를 석권했던 영국을 지난 시기에 자칭 타칭으로 불렀던 단어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도 했다.

이 ‘대(大)’자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해 본다. 일제가 본보기의 대상으로 영국을 설정한 까닭은 효과적이었겠다. 또 자신의 여러 나라에 대한 침탈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도 ‘저 대영제국을 보라’는 깃발은 설득력이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말이다.

영국과 같은 이미지와 힘을 지닌, 또 세계를 ‘다스릴’ 이유를 가진 대(大)일본을 과시하기 위해 일본이 내걸었던 대영제국이라는 깃발로 우리는 과거 영국과 만났다. 대미국 또는 대중국이라는 말은 없다. 이젠 대영제국도 대일본제국도 유물이 됐다.

그러나 이 같은 제국시대의 관성(慣性)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간혹 이의 논리적이지 못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대영박물관’이란 칭호다.

런던에 있는 영국의 국립박물관인 영국박물관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왜냐고 묻는 이도 별로 없다. 이 박물관의 공식 이름은 그냥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이다.

혹 과거에 다른 이름인 적이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영국박물관의 관장이었던 데이비스 윌슨 박사는 “우리 박물관의 유일한 이름은 ‘영국박물관’이다”라고 방한(訪韓) 당시 필자에게 말했다. 일부 국가에서 ‘대영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르겠다고 했다.(1983년 3월8일 동아일보 참조)

일본의 언론은 과거 ‘대영박물관’이란 이름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영국박물관’을 쓴다. 일본어로 된 관광안내서 등에는 영국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이란 이름이 섞여있다. 유독 우리만 아직 거의 ‘대영박물관’이다.

필자는 이를 우리 민족의 집단의식에 스민 과거의 흔적일 거라고 본다. 말하자면 식민지배의 언어적 잔재다. 그러나 언어나 생활상 등에서 일제의 흔적이 대부분 지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이 명칭만이 건재(?)한 것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 듯하다.

신문사나 방송사들이 전시회나 강연회 등 영국박물관과 관련한 이벤트를 벌이면서 그 제목을 꼭 ‘대영박물관’이라고 표기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더 그럴싸한 제목으로 포장하여 자기 몸피를 크게 보이고자 하는 하등 동물적 마케팅 수단, 문화로 포장한 돈벌이의 꼼수인 것이다.

심지어는 최근 영국의 도서관과 관련한 자기 회사 행사를 알리면서 서울의 한 신문사는 광고와 기사를 통해 ‘대영도서관’이라고 썼다. 좀 서글픈 코미디 한 토막 아닌가? 역사의 흔적과 함께 치사하고 유치한 우리 의식의 한 단면이 이 ‘대(大)’자에 스며있는 것 같다.

언어의 정치경제적 속성 중의 하나다. 더러운 뇌물을 ‘떡값’ 또는 ‘촌지(寸志)’라고 표현하는 사회의 관행과 이를 거침없이 수용하는 언론의 태도에서도 우리는 언어의 이런 속성을 본다. ‘원활한 흐름을 위한 미덕’이라는 가진 자들의 뇌물에 대한 입장을 대변해 죄악을 분칠한다.

정부가 추진하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4대강 사업에 정부가 붙인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이 요즘 필자에게는 퍽 거북하다. 신문과 방송의 보도와 광고를 통해 온 국민에게 퍼부어지는 이미지 폭탄이다. 반대자들의 주장은 ‘살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선량한 백성들에게 강요한다. 끝내는 이런 말을 듣고 말았다.

“강을 살리자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것 아니요? 그 사람들은 그럼 강을 죽이자는 것이요?”

그 택시운전사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관련 얘기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가보다. 운전사는 내가 그의 말에 의당 맞장구를 쳐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한 정치인이 ‘4대강 살리기’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정부와 정부에 장악된 언론들의 일방적인 ‘살리기’ 타령 때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지금의 상황은 퍽 위험하다. 반대자를 악으로 규정하는 언어의 기술이 최소한의 여과장치마저 깨뜨리고 있다. 언어로 표현된 독재의 모습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말을 아는가? 일본과 조선이 하나란다.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웠고, 일본과 조선의 신문과 방송이 이 말에 박수쳤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인가? 역사를 보면 말을 바로 써야 할 이유가 절로 드러난다. 대영박물관도 영국박물관으로 바로 써야 한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