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 <본지 논설주간>

모름지기 글은 쉽고 짧고 질박함을 그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이(易) 단(短) 소(素)의 말글이야말로 소통으로 서로를 친하게 하고, 언어의 교통에서 생기는 여러 갈등을 예방하고 치료한다. 이는 민주주의이고 인본주의이다. 겸손과 정직의 얼굴일 터이며 착한 심성의 도구이다. 이는 필자의 상식이고 주장이다.
어려운 말, 기나긴 글, 교언(巧言)과 영색(令色)으로 치장된 문장은 마땅히 피해야 할 대상이다. 남의 글을 대할 때도 그렇지만, 자신이 글을 지을 때도 이는 가슴에 새겨야 할 교훈이다. 간판은 그럴싸해도 내용이 어질지 못하거나, 심하면 거짓과 음모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남이 알아듣기 쉽게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글을 쓰는 이는 배려의 마음이 없는 필자이거나, ‘나 중심 세상’의 일기(日記)의 저자에 불과하다. 뜻이 통하는 것이 으뜸인 말과 글의 본디를 모르는 이의 글을 부러 읽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쉽고 짧고 질박하게 지은 글은 어떤 것인가? 뚝배기처럼 수수하지만 우주를 담을 수 있는 빈터가 있는 글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비워서 하늘을 담는, 마음이 찍힌 상쾌한 글을 말함이다. 거창한 직함 꼬리 단 필자치고 이런 착한 글 쓰는 이 못 봤다. 유명하다고 해서 거만해진 이름들이 만들어낸 글들도 자주 가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글이 딴 뜻을 품으면 이미 맑은 기운이 없다. 모두가 이런 모양을 환히 읽을 수 있으면 세상에는 좋은 필자만 있겠지만, 아직은 나쁜 필자도 드물지 않다.
쉽고 짧고 질박함을 말글살이의 바탕으로 삼는다면 글 짓는 법이나 글 읽는 법에서 더 밝아지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터다.
한다하는 이들의 문장론도 그렇지만, 어린 학생들에게 글 짓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책도 다 그렇고 그렇다. 좀 보태 말하면 ‘사기꾼’ 반열에 올려야 할 이들이 수두룩하다. 아무리 봐도 ‘글을 어떻게 쓴다’는 얘기는 없고 흰소리만 늘어놓았다.
붓방아도 못 찍고 남의 글 따다 붙이는 것을 ‘공부’로 삼는 대부분의 젊은 언중(言衆)들에게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따위의 그럴싸한 ‘썰’ 푸는 것이 문장론인가? 자기 글 잘 쓴다는 자랑이나 몇 조각 에피소드가 글쓰기 교재인가? 젖꼭지도 제대로 못 무는 아기에게 산보를 논하고 조깅의 미덕을 설파하는 것이 소위 글 선배들의 할 짓인가?
그나마 대부분 책들이 옛날 책 말 바꿔 베끼고, 그 글 외국어 섞어 다시 베끼고, 순서 토씨 단어 바꿔 서로 다시 베끼는 블랙 코미디다. 그리고 애당초 그 원본은 일본 사람 문장론이었거나 미국 사람의 그것이었을 터이니, 서로 삿대질은 할지언정 누구 하나 손목 걷어 부치고 ‘한판 싸워보자’ 나서는 이도 없는 상황이겠다. 표절 논란도 사치스럽다.
좀 기반이 됐다 싶은 저작들도 대부분은 ‘문학론’ 또는 ‘수필론’이라는 제목이 어울릴 내용들이다. 수십 년도 넘은 문학론이 해제라는 명분까지 붙어 새 얼굴인양 문장공부 책으로 팔린다. 또 비슷한 제목의 책들도 실은 논술시험 교재라는 명분으로 그럴싸하게 논설문 형식의 글을 요령껏 지어내는 방법론 교재들이다.
문학론이나 논문작성법이 문장론 또는 글 짓는 방법 교재로 둔갑해 젊은이들을 실망시키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다.
글짓기를 가르쳐보지 않은 필자들은, 그들의 문장과 논리가 아무리 풍요롭다 한들,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대중들의 아픔을 모른다. 이 두려움과 아픔을 이해 못하는 이들은 소위 ‘문장’과 문장교육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문장을 만드는 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젖을 물리고 걸음마를 시켜 첫발을 떼게 하는 빈빈(彬彬)한 모성(母性)이 필요하다. 같이 떠나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