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일

오는 5월 19일은 불기 2546년 부처님 오신날이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현덕면 소재 심복사 주지 정견스님이 특별법문을 설 하셨다. 정견스님은 우리시대 선지식이신 고암큰스님의 일생과 금강경, 보왕삼매론을 예로 제시하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상보시(無相布施)의 베푸는 삶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을 전했다. <편집자>


고암 큰스님 일생동안 5전의 보시에 공덕 회향

큰 선지식 한분이 15년전 해인사에서 입적하셨습니다. 이 어른은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3번 역임하셨고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시다가 만년에 해인사에 주석하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고암 큰 스님입니다. 보살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고암스님은 어떤 권위의식도 없고 마냥 항상 미소를 지으시고 아무리 어린 제자일지라도 존대말을 쓰셨던 스님은 진정 자비의 화현(化現)이셨습니다.
고암스님은 평소 돈을 저축하거나 물건을 쌓아놓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도들이 용돈이라도 드리면 며칠뒤에 필요한 사람에게 다 나눠주셨고 좋은 물건이라도 생기면 필요한 사람에게 다 나눠주셨으며 절대로 자신을 위해 쌓아두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어느날 한 제자가 "스님께서는 살다가 보면 돈이 필요할 때도 있고 물건이 필요할 때도 있으실 텐데 어찌하여 스님은 모든 것을 다 남에게 주시는지요?" 라고 여쭙자 스님께서 젊은 시절 금강산 유점사로 도를 닦으러 가시던 길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당시는 일제시대로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로 스님도 역시 무척이나 가난하셨답니다. 유점사로 가는 길에 큰 홍수를 만났고 배를 타야만 큰 강을 건널 수 있는 형편이었는데 배 삯은 10전이고 스님의 주머니에는 단돈 5전이 있었답니다. 배삯이 모자라 배도 못타고 서성거리고 있는데 행색이 허름한 한 새댁이 왜 배를 안타고 서성거리고 있느냐 묻길래 배 삯 5전이 없어서 배를 탈수가 없다고 하니 새댁은 옷고름에 싼 돈을 풀어서 흔쾌히 보시를 했고 스님은 무사히 강을 건너 금강산 유점사에 도착해 수행의 길을 걷게 되셨다며 일생동안 새댁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새댁에게 모든 공덕(功德)을 회향(回向)하며 새댁의 안녕을 위한 기도발원(祈禱發願)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시란?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베푸는 일

보시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보시에는 물질적인 보시와 정신적인 보시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보시는 돈 일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기타 경제적인 도움이 되는 그런 것입니다. 또 마음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위로나 격려의 말을 해준다던가 또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던가 하는 것은 정신적 보시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웃에게 전해주는 것을 법(法) 보시라고 합니다. 법 보시는 보시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보시입니다.

법 보시든 재(財) 보시든 보시는 모두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보시를 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조건은 상(相)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상이란 대가를 바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기르는 어려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고 '부모은중경'에 말씀해 놓았습니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이놈이 자라면 덕을 봐야지'하는 생각이 있으면 이것은 상으로서 키우는 것이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라서 잘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효도하기를 바라면 안됩니다. 효도를 바란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깁니다.

친구간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친구에게 무엇을 잘 해줬다가도 그 친구가 섭섭하게 하면 '저 녀석 내가 그전에 얼마나 저 한테 잘해 줬는데 저런 식으로 나를 대하나'하고 밤마다 이를 갈면 이것은 잘못된 보시입니다.

'상'으로서 보시를 했기 때문에 자신의 기대치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뱃속에서부터 불덩어리가 치솟아 올라오고 급기야 홧병에 걸립니다.

보시는 '상'이 없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는 보시를 하면 안됩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야 말로 공덕이 한량없이 크다고 하신 부처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고암스님께 5전을 보시한 새댁의 마음은 스님이 그저 무사히 강을 건너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이었을 것이며 이 바램이야 말로 진정 '상'에 '주'하지 않는 무주상 보시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무릇 있는 바 상은 모두다 허망하다)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저 동쪽에 있는 허공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d 네 생각으로 알 수가 있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대답하기를 "모릅니다. 동쪽의 허공이 얼마나 큰지 제 생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남쪽, 서쪽, 북쪽의 허공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겠느냐?" 그것도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저 동서남북의 허공이 얼마나 큰지 도저히 너의 생각으로 알 수가 없는바와 같이 '상'에 머물지 않고 짓는 보시공덕은 동, 서, 남, 북의 허공을 생각해서 그 양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한량없이 크다. 그 공덕의 크기는 부처님만이 알 수 있지 너희는 짐작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를 하고 보답을 바란다든가 무엇을 도모하려고 하면 그 공덕이 반에서 다시 반으로 줄어들고 급기야는 부작용이 생겨서 업(業)이 됩니다. 그러니 보시를 할 때는 '상'을 버리라는 것이 금강경(金剛經)의 근간입니다.

'저 사람이 내가 그때 보시를 했는데 공덕도 모른다."고 미워하면 상대방은 '자기가 나한테 뭘 해줬으면 얼마나 해줬다고 그걸 가지고 유세를 떠느냐.' 하며 서로 미워하게 됩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보시를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가 초래되고 맙니다.


덕을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말라. 덕 베푼 것을 헌신짝처럼 버려라.

보왕삼매론 보면 '덕을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말라. 덕 베푼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보시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보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우리는 네가지 큰 은혜속에서 살아 가고 있다.' 하셨습니다. 그 중에 부모의 은혜가 있습니다. 부모의 보시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있으며 밥을 먹으면서도 농부의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톨의 쌀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가까이 알고 지내던 농부가 심지어 경운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개구리며 메뚜기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희생된 생명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신나게 고속도로를 달리며 도로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수 많은 희생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명복을 비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엄청난 고마움과 은혜 속에 살면서도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기억에 있는 사람, 기억에 없는 사람, 또 알고 있는 생명, 모르고 있는 생명들에게 끊임없이 보시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시가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보시에 고마움을 아는 것이 바로 공덕입니다.
보시를 받았으면서 고마움을 모르면 '업(業)'이되고 보시를 하고도 '상(相)'을 내면 이것 또한 '업'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 놈은 준 것 없이 밉고, 저 사람은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가 않다.' 고마움을 모르니까 준 것 없어도 밉고 조그마한 것을 받아도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에게는 가지고 있는 것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보시를 하면서 상을 내고 보시를 받으면서 은혜를 잊어버리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보시를 하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시를 받으면서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바로 극락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부디 상을 버리라는 금강경 가르침을 가슴깊이 새깁시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무릇 있는 바 상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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