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지방 최초 만세운동 횃불 안중쪽 수산(물미)마을 옥녀봉서

평택의 역사와 문화기행-13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초기 만세운동의 유적과 사람들


사건과 관련된 답사는 자칫 싱거운 느낌이 들 수 있다. 사건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유물을 남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래된 사건들은 증언해 줄 사람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특정 사건의 내용이나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알고 가면 유물이나 유적을 대하는 느낌이 새롭다. 나는 지난 2월 말 동행자도 없이 평택지방의 3.1운동 유적답사를 나섰다. 3.1절을 앞두고 우리고장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먼저 발길을 현덕면 방면으로 향했다. 겨울 끝자락에 선 들판엔 아직도 흰 눈이 제법 남아있었다. 현덕면은 평택지방에서 3.1운동이 가장 먼저 전개된 곳이다. 안중을 지나 아산만 방조제 근처에서 권관리를 갔다. 3.1운동 당시 천도교인들이 많이 살았던 권관리는 초기 현덕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마을이다. 팽성읍의 소개를 받아 찾아간 권관3리 이장님을 만나 3.1운동 때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며 천도교인들이 지금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들은바가 없노라고 한다. 마을의 자랑스런운 전통을 잊어버린 마을은 서글프다. 자랑스러운 전통은 주민들에게는 긍지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꿈과 이상을 주기 때문이다. 권관리 주민들이 "평택지방 3.1운동의 시발지 권관리입니다"라는 표지석을 자랑스레 마을 입구에 세울 날을 기대하며 마을을 나왔다. 권관리의 3.1운동 유적에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계두봉이다. 최초의 시위였던 기산리 옥녀봉 시위 후 각 지역에서 우후죽순 만세운동이 전개될 때 권관리 주민들은 계두봉에서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지금 계두봉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아산만 방조제를 건설할 때 봉우리를 헐고 배수갑문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산정이라는 작은 정자로만 남아있는 계두봉에서 쓸쓸함을 달랬다.

차를 돌려 안중방면으로 나오다가 가사초등학교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수산(물미)마을로 들어갔다. 수산(물미)마을은 좋은 샘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샘을 파기도 어려웠고, 함부로 샘을 팔 수도 없었던 옛날에는 좋은 샘을 가진 마을은 어떤 우월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이웃마을에도 샘골(천곡)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은 물(水)의 축복을 받은 마을이었던 것 같다. 물미 마을에서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을 붙잡고 옥녀봉의 위치를 묻고, 혹시 3.1운동에 대하여 들은 것이 없느냐고 했더니 별로 들은 것이 없다며 미안해 하셨다.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 옥녀봉에 올랐다. 해발 83미터이지만 올라가는데 10분도 안 걸린다. 옥녀봉에 오르니 답답했던 주변이 확 트인다. 아산만과 평택호가 발아래 놓이고, 건너편 대안리, 덕목리, 고등산, 마안산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 산이 평택지방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3월 9일 권관리의 천도교인들이 주동이 된 시위대는 옛 가사 면사무소 뒷산에 해당하는 옥녀봉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들의 만세운동에 자극받은 대안리와 덕목리, 신왕리 일대 주민들도 다음 날인 3월 10일 밤에 마안산과 고등산에서 연대 시위를 전개하였다. 최초의 만세시위가 옥녀봉에서 전개되면서 권관리, 기산리는 일본 경찰의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의 감시는 시위운동이 격화되던 3월 22일 권관리의 천도교인들에 대한 연행과 고문으로 이어졌다. 권관리에 살았던 이민도, 최혁래 외 10명은 또 다시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연행되어 자백을 강요당하고 고문을 당한 것이다.

청북면 백봉리 시위는 평택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고 주변 면 단위 지역에서 횃불시위가 전개되던 4월 1일에 있었다. 백봉리 시위는 3월 10일에 발생한 이웃동네 토진리, 신포(현곡리), 무성산 시위에 비하면 늦은 편이다. 이 마을의 시위는 백봉1리 마을 뒷산에서 횃불시위로 전개되었다. 시위를 책동한 인물은 오성면 안화리의 안육만 김원근 등이었다. 이들은 평택역에서의 연대시위를 위하여 활동하던 활동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난여름에 가 보았던 백봉리 뒷산은 풀이 우거져서 주변이 잘 조망되지 않았는데, 이번 2월에 가 본 백봉리 뒷산은 여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수풀이 잦아든 산등성이에는 백봉리 산성이 확연히 드러나 있고, 진위천 주변 마을인 동청리, 토진리, 양교리, 안화리가 잘 조망되었다. 왜 백봉리, 토진리 주민들이 이 산위에서 횃불 시위를 벌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지형조건이었다. 이 산 위에서 안육만의 선동과 최만화, 안희문, 황순태 등의 동조로 전개된 만세운동은 멀리 평택역 광장에서 전개된 대규모 횃불시위에 동조하는 것이면서도 그 자체로도 격렬하게 전개되어 안육만 등 다수의 구속자와 부상자를 내었다.

백봉리에서 어연리를 거쳐 동청교를 건넌다. 이 다리는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만 해도 송탄방면에서 청북과 오성면으로 건너갈 때 반드시 건너야 했던 동청나루가 있던 곳이다. 나루가 있을 때는 주막집도 있었고 간이 시장도 열렸다는데 지금은 임자 없는 나룻배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 문곡리, 당현리, 송탄을 지나 진위면 은산리로 길을 잡았다. 은산리는 미동, 방촌, 기동, 산직촌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미동마을은 단양 우씨가 많이 살고, 방촌과 기동마을은 삼봉 정도전의 후예들인 봉화 정씨의 6백년 세거(世居)지이다. 은산리 만세운동의 주동자는 정도전의 후손인 정경순, 정문학, 정재운이었다. 이들은 동네 사랑방에서 함께 일하던 중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마을 뒷산에서 소리쳐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 봉남리 경찰관 주재소까지 진출하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방촌마을 버스정류장 옆 구멍가게에서 만난 노인들에게 그 때 일을 물었더니, 어릴적 마을 노인들에게 들었는데 주동자들은 주재소에 끌려가 큰 고초를 당하였으며 일본 순사들이 마을을 이 잡듯이 뒤지며 행패를 부리는 통에 마을 사람들도 성치 않았었노라고 말하였다. 처음 정경순 등이 만세를 주동했던 마을 뒷산에는 정도전 선생의 사당 "문헌사"가 이전 복원되어 있었다. 문헌사로 오르는 계단을 걸어 산 위에 올랐다. 나라를 찾고 일제를 몰아내는 크고 의로운 일에 농투산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는가 라며 박차고 일어났던 민중들의 용기와 함성을 듣는 듯 하다.

평택역 광장의 만세운동

무봉산을 울렸던 진위 민중들의 함성을 뒤로하고 평택으로 돌아왔다. 평택의 3.1운동 유적은 뭐니뭐니해도 옛 평택 역 광장이다. 평택(平澤)은 경부선, 호남선 철도역이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에 들어서면서 형성된 근대도시이다. 1950년대 초까지 평택시의 중심은 평택사람들이 "철뚝너머"라고 부르는 원평동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 지역이 상습 침수지역인데다, 1950년대 초에 있었던 큰 수해를 당하면서 오늘날의 평택역 방면으로 이전되었다. 평택역이 건너편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규모가 작은 역사(驛舍)와 역 앞에 작은 역 광장이 있었으며, 광장 앞으로 본정통이라고 하는 큰 거리와 시장이 형성되었다. 원평동 골목골목에는 아직까지 옛 시가지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토박이 노인들에게 물었더니 옛 본정통, 싸전거리, 쇠전거리, 진전거리를 친절하게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준다.

평택역 광장에서 전개된 대규모 시위는 3월 11일, 4월 1일, 4월 9일(4월 9일의 시위는 역 광장으로 행진하던 중 제지당하였다) 등 모두 세 번이 있었다. 3월 11일 시위는 이도상, 목준상 등 초등교육 정도의 근대학문을 배웠고, 미곡상을 하는 등 정보력과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안종각에 의해 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한 안충수가 이도상, 심헌섭, 목준상, 한영수와 거사를 논의하고 주도했던 것도, 평소의 학연관계 및 친분관계를 넘어서, 이들이 평소에도 항일의식이 강했고 지역의 민족운동에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4월 1일의 횃불시위는 지역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되던 만세운동이, 각 면 단위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조직적으로 연대하며 동시다발로 전개된 점에 있어서 주목된다. 이와 같이 시위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도상, 목준상, 심헌섭, 한영수 등 초기 주도층이 구속된 뒤에도, 이병헌 등 천도교 계통의 중앙지도층과 안육만과 같이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성장한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옛날 역사(驛舍)가 있던 원평동은 철도역이 옮겨가고 난 뒤 한동안 슬럼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시대만 해도 번화했던 본정통에는 쇠락해 가는 집들과 노인들, 궁기(窮氣)가 흐르는 아이들만 남았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중반,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도로가 확장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의 변화 때문인지 옛 본정통에서 1919년 3.1운동의 만세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마을에서도 3.1운동은 80년도 더 된 아득한 일 일 뿐이었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역 광장과 거리도 이제 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이곳이 평택 역(驛) 광장이었나 싶게 좁다. 원평동 옛 평택역 광장에서도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민중들의 함성을 느끼기에는 어딘가 어색함이 들었다. 기념식을 하고, 공훈자를 표창한다고 3.1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정신이 되살아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사는 사람들의 기억 저편에 머무는 역사는 쓸모 없는 폐기물에 불과하다. 평택에는 인물도 없고 문화유산도 없다고 자조하지 말고, 평택시는 뜻 깊은 유적지에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 지금 사람들에게 3.1운동 때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전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역사/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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