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화가의 삶과 작품세계

빈센트라는 사람 요즘에 와서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그에 대한 책을 읽고, 그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불가사의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는 37살에 생을 마감한 사람이다. 그는 세상살이에 실패했고, 28살 쯤 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불과 10여 년 동안에 유화 1,250점, 소묘 1,000여점을 그렸다. 간질병과 싸우면서 이틀에 한 점을 그린 샘이다.
그는 초등학교 3년, 중학교 1년이 학력의 전부다. 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다. 다만 요즘의 미술학원 같은 곳에 몇 달간 다닌 것이 전부다. 그러나 빈센트는 책과 그림을 함께 사랑한 지성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종교서적과 특히 문학작품을 열성으로 탐독했다. 그 당시에 나온 문학, 철학, 미술 관계의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가 쓴 668통의 편지에서 예술의 내면과 작품의 제작과정을 이렇게 면밀하게 보여준 기록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 사물을 조리정연하게 분석하고 그리고 치밀하고 유려하게 서술하는 대단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인으로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구사했고 희랍어, 라틴어 까지 어느 정도 공부를 했다.
그는 20여 곳을 떠돌아다니고 철저한 자유를 추구하면서 방랑을 했다. 그림 세일즈맨, 교사, 서점점원, 목사의 조수를 거쳐 목사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작은 교회의 목사인 아버지와의 충돌도 심했다.
그는 술수도, 조건도, 타산도 없이 세상과 사람을 열심히 사랑했지만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모자랐고, 약했고, 슬펐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한없이 사랑했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했으며 지극히 보통 사람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고 처절한 외로움과 싸우면서 살았다. 그는 언제나 고독했다.
예민한 개성으로 넘친 그는 주위 사람들의 기피하는 인물이 되었고 하숙집 딸을 사랑했지만 그녀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그는 인간성이 풍부했지만 아무도 호감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고 미혼으로 평생을 살았다.
고갱과의 2개월간의 합숙은 볼 만 했다.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고갱은, 이타적이고 영혼이 맑은 빈센트와는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동생 테오에게서 받은 생활비를 고갱이 도맡아 지출하고 돈 관리를 하는 기이한 사이였다. 고갱과 빈센트는 성정(性情)이 판이하게 달랐고 예술을 보는 눈도 일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충돌이 잦았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두 사람은 드디어 대판 싸우고 빈센트는 홧김에 자기의 왼쪽 귀를 스스로 잘라버리는 소동을 겪는다. 그는 정신병과 싸우면서 맹렬하게 예술혼을 불태웠다.
정신병은 그의 집안에서는 드문 병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두 숙부도, 어머니 집안에서는 간질 환자가 많았다. 그는 정신병이라고 하기에는... 자기병을 알고 있었고 미리 대비하는 간질 환자였다. 그는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삼촌과 동생 테오도 그림을 파는 화상(畵商)을 했지만 한 점도 팔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느 전시회에서 출품한 빈센트의 그림을 보고는 수준 미달의 그림과 같이 전시할 수 없다고 철거하는 화가도 있었다. 어느 비평가는 빈센트의 강열한 색체를 야만적일 정도로 무자비하게 공격을 했다.
그가 죽기 한 달 전에 겨우 한 점의 그림을 동생 테오가 싼 값에 팔았다. 세상이 달라져서 1987년에 무려 4억 달러에 팔린 천문학적으로 값비싼 그림이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의 그림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가다보면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르노아르의 그림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 삼층에 있는 전시화 도록을 파는 상점 한 구석에 걸려있는 두 점의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유화로 복사한 그림이라고 한다.
그 때는 르노아르의 상품만을 파는 상점에서 ‘붓꽃(iris)’과 ‘아몬드나무에 핀 꽃’ 두 점만이 구석에 남아 있었다. 걸려있는 복사품이 한 점에 일금 80만원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호기심에 그럼 진본은 얼마나 되느냐고 직원에게 물었다. 그는 큐레이터한테서 들었는데 붓꽃은 칠천 억 원에 팔린 것이라고 한다. 도저히 믿기조차 어려운 상상을 초월한 금액이다.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
같은 작품을 두고 그 때의 사람들은 빈센트의 그림을 왜 몰라주었을까? 심지어 빈센트가 이웃 사람에게 그림을 선물로 주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팽개쳤고 마지못해 받은 사람은 다락방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는 것이다. 한참 지난 후에 그 집 먼 후손이 그림을 발견 하고는 비락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웃음이 나오는 세상일이다. 왜 그때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않았는데, 지금의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그렇게나 비싼 값에라도 사려고 안달을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고 보통 머리로는 해석이 안 되는 어리둥절이다.
그의 제수,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그의 그림을 후세에 알린 공로자다. 요한나는 명문가의 규수인데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근무를 한 적도 있다. 처녀 때는 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친 재원이었다.
그는 빈센트의 그림을 진심으로 이해를 했다. 빈센트의 가족들은 그의 그림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테오가 그의 그림 전부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다. 요한나는 빈센트의 편지를 영문으로 번역을 하고 책으로 출판하려고 힘을 썼다. 빈센트와 테오가 죽은 뒤 빈센트가 남긴 유화와 소묘 그리고 방대한 편지를 버리라고 한 이웃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아들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만일 그녀가 그것을 다 버렸다면 지금 우리는 빈센트의 그림자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아찔한 생각이 든다. 빈센트는 보통 인간이면서도 온갖 불행에 굴하지 않고 엄청난 고뇌를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그 후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저서도 수많이 쏟아져 나왔다. 영화로도 수편을 찍었다. 빈센트는 미술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설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으나 늘 실패했다. 번번이 실연당했고,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가족과 친구와 이웃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세상의 사람들을 지독히 사랑했지만 세상으로부터 지독히 외면을 받았다. 언제나 고독했던 그에게 예술은 사랑의 고귀한 구현이고 구원이었다. 그는 신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세상의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소박하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누구나 알아보게끔, 누구나 좋아하게끔 그린 그의 그림 속에 깃든 맑고 깨끗한 영혼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