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상헌
여의도통신 편집위원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 농훈 김성훈 교수(환경정의 이사장)가 최근 펴낸 책 이름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들려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가 이제 자신의 평생의 뜻과 버무려 세상에 돌려주었다. 그는 농업의 큰 본디[大本]된 뜻과 생명의 힘을 쉬지 않고 농사를 지어왔다.
초등학교 시절, 7남매와 전쟁으로 어버이 잃은 사촌 4남매 등 아이만 11명인 대가족 앞에서 고구마 한 소쿠리는 금세 바닥났다. 제 때 챙기지 못한 식구(食口)는 배를 곯아야 했고, 한 편에선 급히 먹느라 목이 메는 소동이 빚어졌다. 그 때 어머니의 말씀이 “얘들아,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였다.

농훈은 책에서 이 뜻을 ‘나누는 삶’으로 풀었다. 또 감투(지위)를 쓰는 사람의 마음자리에도 이렇게 이 뜻을 앉혔다. 
‘남을 생각하고 함께 나누는 삶 치고, 먼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는데서 시작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어떤 자리를 맡았을 때는 그만둘 때를 생각하고, 날마다 마음가짐을 잡도리해야 한다.’
함께 사는 세상의 의미 뿐만 아니라 처세의 비책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또 날씬해지려는 숙녀들에게 다이어트 방법일 것이며, 성인병의 위험에 노출된 중년들에게도 좌우명이 되어야 할 말씀이다.

착한 먹거리를 필요한 양 만큼만 먹는 절제의 미덕은 당신과 세상을 건강하게 할 것이다. 그 뿐인가? 미국 정치가 엘 고어가 ‘기후변화’를 들어 제기한 명제 ‘불편한 진실’에 대응하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오래된 미래’를 아는가? 풍요롭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고, 공동체적 삶 속에서 여성들과 노인들이 존경받는 사회, 빈약한 자원에 엄혹한 히말라야 고원 라다크 사람들의 검소한 생활에서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진실’을 본 생태운동가 헬레나 호지의 뜻이다. 그러나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의 뜻과 다른 바를 필자는 찾지 못 한다. 기후변화의 그림자가 인류의 앞날에 드리워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감았다. ‘어리석은 위정자’를 삿대질하여 면피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아버지 부시가 어떻고, 아들 부시가 또 그랬고, MB는 또 어떻고 하는 한가한 얘기만으로 ‘나’는 어찌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으랴?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의 뜻을 진작 새겼어야 했다. 정치인들의 무지함은 이런 수많은 ‘나’에 토대를 둔 것 아니던가? 국제적 경제위기 때문에 ‘정의’는 잠시 선반에 올려 두자고 하는 이도 있다.

이 경제위기가 자연을 약탈하는 개발의 무한질주에서 비롯된 것임을 외면하고, 이를 치유한답시고 또 다른 ‘질주’를 벌이자고 한다. 심지어는 ‘삽질’에 녹색 물감을 덧입히는 ‘사기’와 ‘협잡’이 횡행한다. 결국 우리가 ‘나’를 경계하지 않았기에 결국 이런 상황이 빚어지게 된 것이다. 이 경제위기를 지구촌이 공존의 터전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는’ 지혜의 성찰과 실천만으로 이는 가능하다. 현실성 없는 이상론이라고? 스스로를 바르게 할 생각 없이 ‘남’이, 그리고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만 생각한다면 어떤 탁월한 정책이나 산더미 예산도 다 공염불이다.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는 우리의 삶이 잉태한 진리다. ‘나’부터 시작해, 모든 이가 이를 기꺼워하고 몸소 실천하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사랑의 혁명’으로 키워내 온 세상을 기쁨으로 물결치게 하고 싶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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