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 준 서 (비전동 거주)
사극을 보면서 새롭게 역사를 배우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되새기기 보다는 극자체에 빠지다 보니 나무만 보고 숲을 못보는 일이 다반사다. 방송국에서는 시청율제고를 위해 역사드라마도 드라마인 이상 작가의 상상력을 통한 허구가 동원되는데 '허준'의 예진아씨처럼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거나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의 동생이 오빠로 나오고 정난정의 출생도 첩실소생이 아닌 파릉군의 딸로 설정하는 등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부분도 많다. 드라마의 완결성을 높이고 흥미를 유발시키기위해 이해한다 쳐도 자녀들이 볼때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그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극을 보면 궁중의 왕실용어나 호칭이 약간씩 다른데 이해를 돕고자 몇가지 寄稿하고자 한다.
'왕건'에서는 왕이 자신을 칭할 때 짐이라고 하고'여인천하'에서는 과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려에서는 稱帝建元(칭제건원) 즉 황제를 칭하고 나라의 연호를 정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높여 朕(나 짐)이라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事大했기 때문에 寡人(적을과.과부과)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지칭했다. 또는 왕이 되기위해서는 아버지인 왕이 붕어해야 했으므로 과부의 아들로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과인으로 지칭했다는 설도 있다. 신하들이 임금을 호칭할 때는 황제는 폐하라 했고 왕은 전하라 했다.
왕비를 가리켜 중전마마라 했는데 이는 왕비가 거처하는 대궐의 이름이 중궁전이라 중전마마라 하며 세자는 거처하는 곳이 떠오르는 태양의 정기를 이어 받으라고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궁마마로 불리웠다. 왕비의 소생들은 남자는 대군 여자는 공주로 불리우며, 후궁의 소생들은 군.옹주로 불리웠다. 조선시대의 내명부는 태종때 정한 것으로 당나라 태종떼의 것을 참고로 하였는 바 정실인 왕비가 있고 그 밑으로 후궁들은 정일품인 빈이 있고 차례로 종일품의 귀인, 정이품부터 종사품까지 소의,숙의, 소용, 숙용,소원,숙원이라 했으니 후궁이라고 다같은 후궁이 아니다. 이는 후궁의 집안내력 및 총애도에 따라 정해졌다. 상궁은 정오품으로 후궁은 아니며 궁중 나인들을 총괄했다. 무수리는 나인들의 잔심부름이나 세숫물 시중을 맡았던 종이다. 하지만 이런 하찮은 수발을 들다가 어느날 갑자기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 그 다음날 아침 침전에서 나와 치마를 까뒤집고 성은을 받은 것을 공표하는데 이때부터 신분의 수직상승이 이루어지고 졸지에 나인들을 거느리며 후궁수업을 받는다. 무수리중에 후궁이 된 이는 조선왕조의 최장수 왕인 영조대왕의 모친이 대표적이다.
대감은 정이품 판서 이상의 벼슬아치를 높여 일컫던 말이고 영감은 종이품과 정삼품의 벼슬아치를 높여 관직명에 붙여 부르던 별칭인데 더러는 외관직 종사품인 군수에게 까지 붙여 불렀다. 문무관의 부인들의 칭호는 가자품위(加資品位)에 따라 문무의 구별없이 정.종일품의 부인은 정경부인이라 하고, 정.종이품의 부인은 정부인이라 하고, 정삼품 당상관의 부인은 숙부인이라 하고 정.종삼품 당하관의 부인은 숙인이라 했으니 선산이 있는 분들은 성묘때나 시제때 비석을 살펴보면 조상님의 벼슬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하는 임금을 알현할 때 지존한 왕 정면에서 절을 드리는 것은 공손치 못하므로 사선으로 향하여 절을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곡배(曲拜)라 한다. 임금이 문신들과 강론하는 자리는 경연(經筵)이라 했고, 세자가 하는 자리는 서연(書筵)이라 했다. 황제가 내리는 글은 조서(詔書) 또는 칙서(勅書)라 했으며, 황제가 하는 말은 칙어(勅語)라 했고 황제가 보내는 사람은 칙사(勅使)라 했는데 요즘 우리가 대접을 잘 받으면 칙사대접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왕이 내리는 글이나 말은 교서(敎書), 교지(敎旨), 하교(下敎)라 했다. 임금이 죽으면 종묘에 신위를 모시기 위해 묘호(廟號)를 붙였는데 [禮記]의 '공이 있는자는 조(祖)가 되고, 덕이 있는자는 종(宗)이 된다'.는 것에 따라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업적이 있는 임금에게는 조를 붙였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문물을 융성하게 한 임금은 대개 종자로 붙였다. 삼국시대 신라 무열왕이 처음 사용했고 고려때는 태조부터 사용타가 원나라의 침입으로 충렬왕 부터는 조와 종을 쓰지 못했으며 조선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름법을 사용했다.
T.V사극으로 인하여 지나간 한시대의 조명을 통해 우리에게 역사를 검토할 기회를 주고 있다. 고려 건국이나 조선. 한말이라는 시대는 우리가 익히 알아두고 새롭게나마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상의 공적이나 비행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조상에 대해서도 비판적 안목을 구사하면서 오늘을 직시해야 한다. 아이들의 겨울방학도 절반을 지나고 있다. 조선조 27명의 임금 가운데 7명의 후궁이 자신의 소생을 왕의 반열에 오르게 했는데 그들의 넋이 잠들어 있는 곳이 칠궁이다. 이 일곱개의 궁은 원래 다른곳에 산재했지만 지난달에 한곳에 모아 단장을 했다하니 겨우내 움츠렸던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고궁의 눈을 밟으며 역사의 현장을 답사해보는 것도 이 겨울을 나는 한 방법일 것이다.
평택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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