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적십자 봉사회 평택지구협의회
북한으로 의약품을 전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우리 방북단 일행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늦가을의 맑은 햇살과 공기가 따스하게 감돌고 있을 평양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 것이다.
전세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북측으로 순항을 하고 있을 즈음 상공에서 내려다본 한반도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해안선의 하얀 모래사장과 작은 마을들은 우리방북단에 그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러웠는지 엷은 안개 속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그때 안개너머 남북의 경계인 NLL(북방한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깃배 하나 전혀 없는 조용한 저곳이 북한이 시작되는 곳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 생각했던 것 보다 방북의 긴장감이 들진 않았다. 이렇게 편히 갈 수 있던 북한 이었던가, 서해직항로를 이용해 북한을 갈수 있다니 어릴 적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로서는 참으로 혼돈과 감격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북녘 땅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야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가파른 산하를 계단식으로 개간해 농사를 짓는 듯싶었다.
그래도 높은 산에는 제법 큰 나무들이 빼곡히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며, 단풍 또한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집단 농장인 것 같은 곳에서 가을걷이를 마치고 벼이삭을 줍는 주민들의 모습에서는 60년대 내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마을은 규격화된 창고 형태의 주택이 집단으로 모여 있고, 낙엽이 져서 스산함이 감도는 신작로엔 북한군인 몇몇이 발길을 재촉하며 어디론가 거닐고 있었다.
잠시 후 콘크리트로 포장된 순항공항 활주로가 보였다. 아! 이곳이 북녘의 수도 평양 순항공항이란 말인가. 우리의 동포, 우리의 산하라서인지 산의 나무도, 들에 억새풀도, 저 멀리 들새들도 모두 정겹게 느껴진다.
활주로 한쪽에 인공기가 나붙은 ‘고려항공’ 말고는 남과 북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 한민족, 금수강산, 우리 동포가 하루빨리 이곳에서 평화와 행복을 만들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우리일행은 평양시내 44층 쌍둥이 빌딩인 고려호텔에서 여정을 푸는 것으로 평양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호텔은 생각보다 아늑하고 쾌적했으며, 평양역을 비롯한 시내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도 있었다.
이튿날 우리방북단은 제약, 의료, 은행협회에서 기증받은 28억원 상당의 의료기와 의약품을 평양적십자병원에 전달했다.
평양적십자 병원은 1948년에 문을 열었는데, 14개 전문병원과 1500명의 의료진을 합쳐 200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1000개의 병상을 운영하고 있지만 낙후된 의료장비와 시설은 우리의 1970년대 수준정도로 보였다. 병원을 방문해 의료품을 전달 한 후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낙후된 시설과 의료기기, 의약품, 의료기술이 하루빨리 우리 수준만큼 향상되어 북녘 동포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평양은 잠자는 도시와도 같았다. 도심 속에서는 사람들이 손전등을 들고 다니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고, 도시의 아파트는 하나같이 페인트가 바래있었다. 가로등은커녕 희미한 아파트의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내 생전에 처음 보는 목탄차와 한가한 도심 속 반듯한 도로에 간간히 다니는 차량들.
‘죽음의 도시’ 라고 접한 신문기사의 ‘악의’가 이해될 듯 했다.
평양의 백선기념관을 필두로 대동강의 유서 깊은 대동문과 묘향산의 보현사, 국제친선전람관, 서산대사의 사당, 만경대 김일성생가, 개선문, 주체사상탑, 평양 학생 소년궁 등 평양에서 보낸 3박4일은 정말 색다르고 신비스런 경험이었다.
우리일행을 가족처럼 적극적으로 맞아준 조선적십자 장재언 위원장과 일행에게 지면을 통해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서로의 체계를 이해하고, 상호 경제협력과 문화예술, 관광과 인적 교류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분 통일을 기대해보는 마음이다.
지금도 황금빛 노란 낙엽이 나뒹굴고 있을 평양에서의 추억을 뒤로하고, 민족의 화합된 미래를 기약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