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윤 정 견 심복사 주지
가. 심복사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전설
심복사는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광덕산 아래에서 동남향으로 평택호를 내려다보며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설악산 등 큰산에 비하면 조그마한 뒷동산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산 없이 들판만 펼쳐진 평야에서 서해를 끼고 솟아오른 광덕산에 오르면 바다와 평야를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비록 조그마한 산이지만 사방이 확 트여 멀리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더구나 평택호가 심복사를 한바퀴 돌 듯이 둘러져 있어서 풍수지리에 관심 있는 이들은 모두 명당이라고 감탄합니다. 심복사는 1,1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부터 터 잡고 내려왔으며 또한 기이한 전설도 있습니다.
옛날 수원군 광덕면 어은동 앞바다(지금의 평택호)에서 고기잡는 천씨, 문씨, 박씨 세 노인이 어느날 바다에서 그물을 들어 올릴 때 문득 한 돌덩어리가 떠올랐습니다. 때문에 다시 바다에 돌을 던져버리고 고기를 잡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서 어망을 들어올린즉 또 다시 그 돌이 떠오르기를 세 번이나 거듭함으로 기이하게 여겨 뭍으로 이양해 보니 불상이 앉은 모습으로 한길이 넘고 커서 적은 수의 인력으로는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한 노인이 업으니 가볍기가 나뭇잎 같았습니다. 문득 불상이 말하기를 『내가 있을 곳은 신복』이라 말을 함으로 불상을 업고 광덕산으로 올라오던 중 갑자기 무거워져서 촌보도 움직일 수 없어 쉬었다가 다시 업고 가고자 하였으나 땅에 내려 놓았다, 잠시 후 불상을 다시 업으려 하니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불상이 심복으로 가자한 인연지가 바로 여기라 믿고 그 자리에 절터를 닦았습니다. 현몽으로 가르침을 받아 발견한 파선된 배를 흰소와 검은소 두마리에 싣고 옮겨와서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습니다.
절을 다 짓고 파선된 배의 재목을 나른 소 두 마리는 문득 죽었습니다. 죽은 그 소를 여법히 장례 지내어 광덕산 남쪽 기슭에 묻었으니 아직도 그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65년전 능인전 상량문에 이와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고 인근에 노인들도 다같이 이러한 전설을 즐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 비로자나불좌상의 20여년전 모습과 연차적 복원
제가 심복사에 부임한 해는 1985년 봄이였습니다.
심복사 법당은 당시 능인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12평 정도되는 낡은 와가였습니다. 기와는 깨어졌고 서까래가 부러져서 비가 오면 지붕에 흙이 불상 머리에 뚝뚝 떨어지는 형편이 없는 지경에 있었습니다.
불상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으로 1972년에 보물 제 56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으며 불신은 121cm, 광배는 분실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좌대와 불상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입과 얼굴표정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선정삼매에 들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통견의 법의로 감싸고 있는 불신은 장대한 느낌을 주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
법의는 통견으로 지권인(智拳印)을 한 두팔을 감싸고 양 무릎으로 흘러 반화문(半花紋)과 평행계단식 주름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대좌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으로 연화좌를 하고 있었는데 하대는 땅에 묻혀 있었고 중대는 두 마리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서 상대를 받치는 모습이었는데 85년 당시에는 이 상대와 중대가 뒤집어져 있었습니다.
상대는 16엽의 활짝 핀 연꽃을 조각하여 불상을 받들고 있습니다.
문화재 관리국과 경기도, 평택군의 보조로 1988년 4월에 문화재 위원 문명대 교수(동국대 박물관 관장) 발굴팀이 심복사 소재 보물 제565호 주변을 발굴하고 땅에 묻혀 뒤집어져 있던 하대석과 중대석을 바로잡았고 불상이 본래 있던 자리로 옮겨서 보호각을 다시 짓고 현판을 대적광전이라고 걸어서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습니다. 발굴당시 문명대교수의 발굴조사 의견서를 보면 그때 상황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본 석불상(石佛像)은 9세기 신라불상 연구에 가장 귀중한 비로자나 석불좌상계로서 대구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석불 봉화 축서사 석불 등과 대등한 불상이며 특히 축서사 비로자나 불상과 유사한 양식이면서도 좀 더 양감있게 조성된 당대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높이 평가된다. 또한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유일한 계통으로 크게 주목된다. 불상은 중대 상대가 각각 거꾸로 전도되어 있으므로 반듯이 해체 복원되어야 한다. 불상을 제대로 복원한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정리하면 문화 관광자원으로 크게 활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상이 바로 그 조사의견서입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상은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지만 광배가 없어진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코와 귀도 원형을 잃었습니다. 파손된 귀와 코를 복원하기 위하여 시멘트를 만들어 붙였는데 언제 어느시대에 이런 무지막지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때 당시에는 잘 보존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일이었겠지만 차라리 파손된 모습 그대로 두었더라면 태고의 고고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지금 간직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의 석조기술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름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시멘트로 떼워진 코와 귀를 제거하고 옛 모습으로 반듯이 복원해야 하는 것이 우리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불상이 주로 코가 많이 훼손되었는데 이는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시대에 배불(排佛)의 한 방법으로 불상의 코를 떼어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우매한 사람들로 하여금 불상을 훼손하게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근래에도 훼괴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문화재를 훼손하는가 하면 도굴, 도난, 파괴 등의 행위로 문화재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무지한 행위를 방지하려면 문화재에 대한 경외심을 국민적 교육으로 문화정신을 고취시키는 노력을 게으르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심복사의 경우 옛부터 불교신자이던 아니던 주변 마을 사람들은 매우 심복사 불상을 신성시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주지로 부임하니 마을 노인들은 심복사 불상을 손가락으로 함부로 가르키기만 하여도 손가락이 부러진다고 말할 정도로 경외시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근 마을 사람들의 한결같은 경외심이 심복사 불상인 보물 제565호가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또 주변마을 노인들의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왜정시대때 까지만 해도 법당 좌우에 석탑 2기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어 매우 단아하고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지금 탑 2기는 모두 파손되어 원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파손된 석탑의 파편을 보고 신라, 백제 시대때의 3층 석탑이라고 하나 정확한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단지 1기만의 파편을 모아 원형을 복원하고자 노력한 결과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하대를 석조탑신으로 갈아 끼워서 삼층석탑으로 현재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문화재 주변의 정비 사업의 차원에서 옛 모습으로 복원해야 할 것입니다. 잘 복원된 탑은 앞으로 역사가 흐르면 옛 문화와 현재의 문화가 어울러진 또 하나의 의미 깊은 아름다운 문화재가 탄생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만약 문화재 가치가 적다고 방치하고 파괴해 버리면 이는 커다란 문화적 손실이 될 것이요, 문화 전통의 맥을 끊는 위험한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평택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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