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본 원균 모략과 중상 박정희 정권의 의도된 '조작'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생가터 울음밭, 내리저수지 옆 묘, 사당, 도일동엔 장군의 숨결이…
숫돌고개 대마거리는 장군이 칼 갈았다는 숫돌에서, 말 기린다는 뜻에서 유래
1.원균에 대한 기억
평소 촌놈 중에 촌놈으로 자부하는 나의 유년의 추억은 5, 60대 아저씨들과 비슷하다. 얼마전 가깝게 지내는 선생님 한 분이 산간 벽촌 출신인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하며 "저는 심지어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자장면을 먹어봤어요"라고 말하기에 나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남들이 들으면 안 믿겠지만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자장면을 먹어봤고, 대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삼겹살이라는 걸 먹어봤기 때문이다. 내가 문명의 혜택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영화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7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동네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동네에서 영화를 보려면, 30리나 떨어진 비인까지 걸어서 10리 버스타고 20리를 갔다와야 했다. 사정이 그렇지만 가끔 동네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학교나 관공서에서 계몽영화를 보여줄 때이다. 대체로 저축이나 반공, 의식개혁과 같은 내용을 주제로 상영했던 이 영화들은 상영한다는 방송이 있게되면 동네사람들은 일지감치 저녁을 해먹고 동네 입구에 있는 공터로 모여들었다. 스크린이 있을리 만무한 마을에서는 큰 소나무에다 하얀 광목천을 쳐놓고 영화를 상영했는데 바람이라도 불면 참 걸작이었다. 그래도 저축과 관련된 어떤 영화는 제법 재미있어서 아직도 내 기억 한 귀퉁이에 남아있다.
내가 모양이라도 갖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시 학교에 "증언'이라는 반공영화를 단체관람하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우리는 비인까지 왕복 40리를 걸어가서 영화를 봤다. 그러고도 우리동네는 학교에서 10리가 넘는 길을 더 걸어와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박물관의 유물만큼이나 오래된 추억이다. 중학교 때도 단체관람으로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가 "성웅(聖雄) 이순신"이었다. 당시 우리의 기억에 하나님 다음으로 위대한 분이 이순신 장군이었으므로 나는 아주 재미있게 그 영화를 봤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순신이었고 나쁜 놈은 원균이었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한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상하게도 왜군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원균의 모략과 중상에 대한 적개심이 더 강하게 솟구쳤다. 이같은 감정이 사실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의도였다는 것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내 유년의 기억에 민족의 간성(干城)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고 민족을 위기에 빠뜨린 역적으로 각인된 원균(元均0을 나는 평택에서 만났다. 그에 대한 관심은 평택지역의 향토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학생들을 데리고 답사도 하고, 가족들과 놀러가기도 했으며, 여러 문헌을 수집하고 검토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원균에 대한 인식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원균에 대한 답사는 그래서 시작되었다.
2.원주(原州) 원(元)씨의 600년 세거지(世居地) 도일동
도일동은 옛 평택시와 송탄시의 경계부근에 있다. 평택에서 출발하면 산업도로를 따라 가다가 평택여종고와 쌍용자동차 가는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248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쌍용자동차와 원칠곡 마을을 지나 원곡에서 송탄으로 가는 340번 지방도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좌회전한 뒤 100미터쯤 가다 길 우측에 원균장군 묘(墓)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건너편으로는 평택 특수전문대학 건설현장이 보이는데, 이 곳에서 우회전하여 곧장 달리다 만나는 마을들이 도일동 마을이다. 도일동은 뒷편으로 덕암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앞으로는 도일천을 두고 있으며, 조선시대만 해도 삼남대로가 지나가던 교통의 요지였다. 관(官)과 멀리 떨어진데다 배산임수(背山臨水)에 교통마져 편리한 이 곳을 양반 사족(士族)들이 그냥 지나쳤을리 만무하다. 그래서 도일동에는 민촌(民村)보다는 오랜 역사를 지닌 반촌(班村)이 많다.
도일동은 크게 하리, 내리, 상리로 나눈다. 그렇지만 덕암산 아흔 아홉 구비에 숨겨진 도일동의 작은 마을까지 합하면 숫자를 헤아리기 어렵다. 도일동 아흔 아홉구비 마을의 대성(大姓)은 원주(原州) 원(元)씨이다. 그 중에서 원씨들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사는 동네가 하리(下里)마을이다. 하리 마을의 원주(原州) 원(元)씨들은 모두 합하여 약 80호쯤 된다. 입향조(入鄕祖)는 세종 때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던 원임(1419 - ?)으로 알려져 있다. 도일동의 원주 원씨 가문은 대대로 무인(武人)집안으로 이름이 났다. 입향조(入鄕祖)였던 원임(元任)(또는 원몽이라고도 함)도 세종 때 무과에 급제했던 무인출신이며, 원준량도 홍문관 교리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무인이었다. 원균(元均)은 원준량의 아들이다. 원균에게는 여러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뛰어난 무인(武人)들이었다. 차남이었던 원연(1543-1597)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향리에 은거하다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며, 정유재란 때에는 적성현감을 제수받아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또 셋째 원전은 무과에 급제 한 후 임진왜란 당시 고성현감으로 있다가 원균 부대의 종사관으로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또 원연의 아들이었던 원사립(1569-1610)도 무과에 급제한 뒤 진주목사, 김해부사 등을 지내며, 여진족과 왜군의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원균의 아들 원사웅도 부친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가 칠전량에서 전사하였다. 이처럼 600년 세거(世居)동안 출중한 무인들을 배출한 역사는 마을의 지명에도 베어있다. 하리 마을에는 대마(待馬)거리, 투구봉, 숫돌고개, 갓골(갑골)과 같은 자연지명이 있는데, 대마거리는 말이 기다린다는 뜻이고, 투구봉은 전쟁 때 쓰는 투구를 의미하며, 숫돌고개는 장군이 칼을 갈았다는 숫돌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3.도일동의 원균장군 유적
도일동에서 만날 수 있는 원균장군의 흔적은 묘(墓)와 사당(祠堂), 그리고 보물 제1133호로 제정된 원릉군 원균 선무1등공신 교서(敎書)와 울음밭이라고 하는 생가(生家) 터가 있다. 묘(墓)는 내리저수지 옆에 있고 사당(祠堂)은 홍살문 앞으로 난 비탈길을 따라 여의실로 가는 언덕 위에 있으며, 생가 터인 울음받은 내리 저수지 위쪽에 자리한 안골마을에 있다. 대 여섯 채 밖에 안 되는 안골마을은 워낙 안쪽에 숨겨져 있어서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들어가 보면 이런 마을이 있는가 싶게 안온하고 포근하다.
원균장군의 묘(墓)는 가묘에 가깝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우리 수군이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시체인들 온전히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타던 애마(愛馬-선조임금이 하사했음)가 장군이 전사한 뒤 유품 몇 가지와 한 쪽 팔을 물고 천리길을 달려 고향마을까지 가져온 뒤 죽었는데, 그 유품으로 묘(墓)를 썼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원균장군 묘(墓) 답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초라한 봉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욱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무덤 옆의 축사 때문이었다. 전에 이곳을 답사하게 되면 홍살문을 지나면서부터 축사에서 나오는 침출수 냄새를 맡게 되는데, 이 냄새를 맡게 되면 답사고 뭐고 아무생각이 나질 않았었다. 같은 선무1등공신(功臣)에 책봉되었으면서도 성역(聖域)처럼 단장된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와 비교되던 시절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3공화국 시절 원(元)씨 문중에서 정비사업을 하고 싶어도 서슬 퍼런 정권(政權)에 눈치가 보여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몇 년 전 원(元)씨 집안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비사업이 시작되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성인(聖人)으로 받들어지고 성역화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잘못 평가된 역사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는 점에서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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