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급제 이순신 앞서…임진왜란 석달전 수군절도사 부임 군비강화
김해규(한광여고 교사)
적선 옆구리 치고 화공 구사하는 '당파작전'에 뛰어나…전함 4척으로 왜선 10척 불살라
육군 수군 연합작전 꿈 펴지 못한 채 칠전량 해전에…장렬한 전사
4. 임진왜란과 원균(2)
원균(元均)은 도일동의 무인가문에서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한 전형적인 무인기질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무과(武科)에도 젊은 나이에 급제하였으며, 승진도 순조로워서 조산만호 부령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여진족 토벌에 큰 공(功)을 세웠다. 원균(元均)이 임금과 조정의 신임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동태는 심상치 않았다. 조선도 일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로 당쟁(黨爭)만 더욱 치열해졌다. 그러나 일본의 동태에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던 조정은 남해안 지방의 방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발탁된 인물이 원균(元均)과 이순신이었다. 원균(元均)은 명성에 걸맞게 수군의 요충지였던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았고, 이순신은 원균보다 중요성이 떨어지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원균(元均)은 일찍이 여진족 토벌로 전공이 높았고 무과 급제도 이순신보다 빨랐기 때문에 당연한 조처였으나, 종6품 정읍현감에 불과했던 이순신이 무려 6계단을 뛰어넘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된 것은 파격 중에 파격이었다. 요즘 말로 전쟁 직전의 위기의식과,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이나 정탁과 같은 막강한 빽(?)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승진이었다.
원균(元均)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부임했던 시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불과 두 세 달 전이었다. 당시 조선은 건국 후 2백년 동안 큰 전쟁이 없는 평화가 계속되면서 국방력이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다. 그는 부임 후 군비강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두 세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은 군비(軍備)를 점검하고 기강(紀綱)을 잡는데도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진에 쳐들어 왔을 때 부산첨사 정발은 군병(軍兵)이 모자라 민간인을 모집하여 대항하였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도 마찬가지였으며, 경상좌수사 박홍은 겁이 나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경상우수영에는 불과 네 척의 전함만이 있었다. 더구나 왜군의 막강한 군세(軍勢)에 병사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경상좌수영이 무너지자 원균은 부산과 가까운 거제도의 군량미를 불태우고 관할 내의 장수와 수령들을 요소에 배치한 뒤 한산도로 퇴각한 다음 이순신에게 전문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관할 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출병을 꺼렸다. 이순신이 출병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원균은 왜군과 수 차례의 전투를 치루며 네 척의 전함으로 적선 10여 척을 불사르는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은 전과는 이순신, 이억기 등과 연합함대를 구축하기 전까지 왜군을 거제도에 묶어두는 효과를 거뒀다.
이 과정에서 원균은 이순신에 대하여 감정이 상했을 법도 한데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이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원균에게는 성품이 호탕하고 큰 일을 위해서는 작은 감정을 묻어두는 대범함이 있었다. 이와 같은 성품은 전투에서도 이순신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순신은 전투에서도 생각을 많이 하고, 신중했으며, 전략과 전술에 능한 지장(智將)의 면모를 보였다면, 원균은 용맹무쌍한 용장(勇將)의 면모를 보였다. 여진족 토벌에서도 그랬지만 임진왜란에서도 원균이 즐겨 사용했던 전술은 당파(撞破)작전이었는데, 이 전술은 지휘선이 맨 앞에서 적에게 돌진하여 적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은 후 갈쿠리와 긴 창 그리고 화공작전을 이용하여 적선을 부수는 전술이었다. 원균이 이와 같은 작전을 즐겨 사용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인 판옥선이 왜선에 비하여 견고하다는 이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전술은 튼튼한 전선(戰船)보다 지휘하는 장수의 용맹함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순신과 연합작전을 전개할 때도 원균은 거의 대부분 선봉에서 싸웠다. 선봉의 원균이 적의 배를 깨뜨리며 교란시키면 뒤를 받치고 있던 이순신이 적을 에워싸고 무찌르는 식이었다.
이순신, 이억기 등 전라 좌,우수영과 연함함대를 구축한 뒤 우리 수군은 원균의 당파작전과 학익진(鶴翼陣)으로 대표되는 이순신의 변화무쌍한 전술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그러나 문제는 전투가 끝난 뒤 승전의 장계를 올리는 곳에서 발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검토해 보면 원균은 이순신에게 합동 장계를 올리자고 제안했는데 이순신은 나중에 하자고 미루다가 원균에게 통보하지도 않고 전쟁의 공(功)이 자신에게 있음을 부각시키며 전리품과 함께 단독장계를 올렸다. 이 문제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서로 반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공식석상에서조차 원균은 이순신을 면박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 난중일기에도 원균이 포악하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반목은 어전회의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거론되었다. 조정은 문제의 핵심인 원균을 충청병사, 전라병사 등 내직(內職)으로 전직시켰다. 하지만 조정대신들 중에는 원균(元均)만 문책하는 것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부원군 윤근수가 대표적인데, 평소 원균의 호탕하고 담백한 성품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던 선조 임금도 윤근수의 의견에 지지를 보냈다. 더구나 이순신은 과거 왕이 공격을 명령했을 때 상황이 유리하지 못하다고 출전을 기피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산적도 있었다. 그와 같은 과거를 기억하는 임금은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공적을 가로챘다는 조정의 일부 여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선조30년 4월(1597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서 박탈되어 서울로 압송된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이순신의 공적을 시기하고 권력을 탐했던 원균의 간계(奸計)에 의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역사란 후대 사람들의 평가(平價)의 산물(産物)이라고 했을 때, 이와 같은 평가는 후대 사람들의 악의에 의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원균(元均)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그러나 용맹하고 우직한 전형적인 무인(武人)기질의 원균에게는 정적이 많았다. 집권세력 중에도 유성룡이나 권율, 이원익 등은 원균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이들은 도원수 권율을 통하여 원균에게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즉시 진격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을 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육군과 수군이 함께 연합작전을 할 것을 주장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원균의 생각으로는 수군 단독으로 공격할 경우 적의 협공을 받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원수 권율의 명령은 단호하였다. 출전하면 패전이요, 자신에게는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원균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조선 수구이 궤멸한 칠전량 해전의 패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 전투에서 원균은 아들 원사웅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논공행상의 자리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은 원균과 권율이었다. 조정에서는 원균(元均)의 공(功)은 인정되지만 패장(敗將)이라는 이유로 선무2등공신에 녹공(祿功)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패배는 원균의 책임보다는 무리한 명령을 강요한 도원수 권율의 책임이라는 선조 임금의 적극적인 옹호와 조정(朝廷)의 여론에 의해서 다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1등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원릉군(元陵君)에 봉해졌다.
5.역적(逆賊)인가, 명장(名將)인가
원균(元均)은 역적이 아니라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명장(名將)이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임진, 정유재란의 전공(戰功)을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했던 1603년(선조 36년)의 평가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순신을 역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한 인간의 삶에서 공(功), 과(過)는 있겠지만, 장수로서 이순신은 탁월한 인물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순신을 성웅(聖雄)으로 평가한다거나, 원균을 간웅(奸雄)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역사의 평가는 더함도 덜함도 없는 객관적인 것이어야 참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문화기행>
평택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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