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우 (딜로이트코리아 회장)
'새벽을 여는 강연'은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 한국인간개발연구원(KHDI)의 조찬강연을 지상중계하는 코너입니다. KHDI가 지난 3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1517회(금주 기준)나 진행해 온 조찬강연은 국내 최다 회수를 기록하며 최고 권위의 강연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9월 13일 코엑스 인터콘티넨탈호텔 다이아몬드룸에서 전광우 딜로이트코리아 회장이 ‘금융선진화가 국가경쟁력이다’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이 기사가 독자들의 교양 쌓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세계은행 금융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하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급거 귀국해 경제부총리 특보로 활동했던 전광우 딜로이트코리아 회장. 대한민국 국제금융대사로 임명된 그는 “지난 10년 동안 국내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수익성은 크게 개선됐지만 국제경쟁력 차원에서는 아직도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금융은 왜 중요한가? 경제를 우리의 ‘신체’에 비유한다면 금융은 ‘심장’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제조업 위주로 성장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방식의 성장에 한계가 왔다. 물론 포스코와 현대자동차 같이 경쟁력 있는 제조업은 더 키워나가야 하겠지만 균형 잡힌 질적 차원의 성장을 위해서는 서비스산업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금융산업은 부가가치 높은 지식기반 서비스산업을 견인할 수 있는 고성능 엔진이다. 그런데 현재 국내의 금융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다. 미국은 3만달러 시대를 이루었을 때 금융산업이 GDP 성장에 기여한 비중이 10.8%였다(영국은 16%). 반면에 한국은 지난해 1만8천달러에 도달했을 때 GDP 성장 기여도가 7.7%에 불과했다.”
‘감독’만 있고 정작 ‘서비스’는 없어
금융산업의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금융국제화(Financial Globalization)가 촉진돼야 한다는 것이 전 회장의 논지인 듯했다. 급변하는 세계경제, 특히 최근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 따른 글로벌 금융경색과 같은 외부충격을 더욱 잘 감내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시장을 포함한 한국 금융섹터 전반의 업그레이드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금융국제화 수준을 측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은행의 해외자산 비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국내 은행이 보유한 자산 중 해외 부분 비중은 2.5%에 그치고 있다. 반면에 스위스의 경우는 90%, 독일의 도이치뱅크는 80%, 미국의 시티그룹도 40%가 넘는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는 선진국 같은 글로벌 금융회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예컨대 영국의 글로벌 기업 중 29%가 금융회사이다(호주는 50%, 일본은 17%). 한국은 14%에 불과하다. 우리 은행들이 좁은 국내 시장에서만 경쟁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물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밖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국제경쟁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면 과감하게 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한마디로 해외네트워크가 취약하다는 비판이다. 실제로 해외자산 비중이 2.5%밖에 안 된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우리 은행들의 영업범위는 국내에만 편중돼 있었다. 2002년 103개였던 해외점포가 5년이 흘렀음에도 10개가 늘어난 113개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전 회장은 국내 은행의 취약한 수익구조도 지적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 은행들이 이자수익에 너무 편중돼 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전체 수입 중에서 대출을 통한 이자의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이 87%나 된다. 10억원을 벌어들였다고 한다면 그 중에서 거의 9억원이 대출 이자인 셈이다. 미국의 경우는 이자 수익 비중이 57%, 영국은 54%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쪽 대출이 좋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쏠림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리스크가 될 수 있는데,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따라서 글로벌 리딩기업이 되려면 자본금 규모를 늘리기 위한 외국 회사 인수 등 M&A를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 체격이 좋다고 꼭 장타를 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적당한 체격은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전 회장은 전문성을 갖춘 금융 인력의 부족도 지적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전문인력 비율은 10% 미만이다. 그러나 홍콩이나 싱가포르 경우에는 전체 인력 중에 40~50%가 전문인력이라고 한다. 한국이 OECD 회원국 중에서 금융산업 생산성 19위라는 매우 낮은 성적을 기록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금융의 선진화와 국제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드웨어적인 측면과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을 동시에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본시장통합법 도입과 금산분리 완화를 둘러싼 논쟁이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감독체계의 예방적 기능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 선진화된 감독체계라면 사후에 문제를 발견해서 처벌하는 것보다 사전에 리스크를 줄이고 예방하는 것에 역점을 둬야 한다. 금융감독원의 영어 명칭은 ‘Financial Supervisory Service’이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 이런 조크를 하곤 한다. 한국의 FSS는 가운데 ‘S’는 있는데, 마지막 ‘S’는 없는 것 같다고 말이다. 한마디로 서비스가 없다는 것인데, 감독기관이 피감기관에 대한 서비스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감독체계의 선진화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도개선과 같은 하드웨어적 측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식개혁과 같은 소프트웨어적 측면이 아닐까. 실제로 전 회장도 이날 강연에서 건전한 투자문화의 선진화, 금융관행의 합리화, 글로벌 마인드의 정착화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증권사의 객장문화를 언급하면서 단기투기성 마인드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권사 객장에 가 보면, 전광판 앞에 의자가 길게 배치돼 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저 분들이 주식의 변동을 보고 있는 것인지,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매우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사실 객장을 그렇게 크게 만들어 놓고 있는 증권회사 영업점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하고, 정도는 약하지만 중국도 비슷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세계적으로 각국의 주식시장을 비교해 볼 때 주가 변동성이 제일 높은 나라가 이 두 나라라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두 나라는 내기를 좋아한다. 중국에는 마작 문화가, 한국에는 고스톱 문화가 뿌리박혀 있다. 단기적이고 투기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화를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의 영어 구사 능력 높이기 중요
그런데 전 회장을 더욱 황당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고 한다. 앞장서서 이러한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언론들이 도리어 투기 문화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방송의 경제 프로그램은 차트를 그려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식시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한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낯선 풍경은 사실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그것은 명백하게 투자자를 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장기적 시각을 가지고 주식에 내재된 가치를 생각하며 투자하는, 선진적인 투자 문화가 빨리 정착돼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싱가포르의 세계적인 투자기관이 테마세크의 회장을 만났다. 이 회사는 하나은행의 지분 10% 정도를 갖고 있는데, 그에게 한국이 금융산업의 선진화를 이루려면 뭐가 제일 필요하다고 보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는 ‘한 마디로 얘기하면 글로벌 마인드를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답변했다. 결국 사람과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제도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의식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전 회장은 이밖에도 다양한 제안을 제시했다. 금융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인력의 육성 및 유치와 더불어 영어 구사 능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한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인들은 영어 알파벳 중 l 발음을 잘 못해 r로 발음한다. 토니 블레어가 선거를 앞두고 일본에 갔는데, 일본 수상이 ‘선거에서 승리하길 바란다’고 덕담을 던졌다. 그런데 election(선거)이라는 단어를 erection(발기)으로 발음하고 말았다. 졸지에 ‘발기가 잘 되길 바란다’로 와전됐는데, 덕분에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f와 p, b와 v 등 혼란을 주는 영어 발음을 정확히 구분해서 발음할 수 있도록 표기법을 고치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노력할 때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ssal@ytongsin.com
전광우 회장의 이력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미 인디애나대 경제학 및 경영학 석사, 경영학 박사
▲ 미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미 미시간주립대 경영학과 교수
▲ 세계은행(World Bank) 금융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
▲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특보, 고문
▲ 국제금융센터 소장
▲ 우리금융그룹 부회장
▲ 포스코 사외이사
저서: <왕도는 없고 정도만 있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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