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 1인당 3천만원 투자해 저출산 극복한 프랑스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백만의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싸웠던 테르모필라이 전투를 재현한 영화이다.
따라서 바보스럽게 100만이라는 수로도 300명을 제압하지 못한 페르시아군을 비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당연히 페르시아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이란 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500년이 흘러도 역사는 살아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전쟁의 이면에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왜 300인가이다.
물론 질것이 뻔한 전쟁이라서 300명밖에 보내지 않았겠지만 사실 스파르타에는 남은 군대도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스파르타는 2천여명도 되지 않는 성인남자가 있었다.
심각한 인구감소가 스파르타를 쇠락하게 한 것이다.
고대 스파르타가 몰락한 가장 큰 원인은 인구감소였다.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잠시 그리스의 패자가 되지만 역시 소수의 한계는 어쩔 수 없어 이내 몰락하게 된다.
토지독점 심각해지면 인구감소는 필연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구감소의 원인으로 토지 체계를 들었다.
처음에는 다수의 노예를 지배하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 출산을 장려하여 한때 보병과 기병 3만명을 보유하였지만 말기에는 1천명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쇠락했다.
스파르타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인력난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것은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절정기부터는 문호가 닫힌다.
외국인들은 철저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재산권에도 제약을 주고 정치적 권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내부에서의 출산장려책이 성공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인구증가를 위한 법은 토지독점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당시의 대책은 자녀 셋을 두면 노동에서 면제되고, 넷을 두면 세금까지 면제되었다.
하지만 인구가 늘면서 토지가 분할되자 상당수가 빈곤해졌다.
그래서 부유층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출산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때문에 3세기 즈음에는 700 가문으로 줄고 그나마도 토지를 소유한 가문은 100여 곳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외국인을 유입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결국 토지라는 경제문제가 가져온 인구감소가 스파르타를 몰락하게 만든 것이다.
스파르타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이 부유층으로 진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스파르타는 이런 배타적인 정책 때문에 스스로 절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긴밀한 결합으로 자신의 계급을 유지하려는 정책과 일종의 암묵적 산아제한, 가족규모제한, 독신주의 횡행 등도 인구가 감소하는 원인이었다.
이에 반해 영국 귀족계급은 가문이 끊기고 작위가 단절되어 귀족의 수가 줄어들자 새로운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그 세력을 유지했다.
스파르타에서 교훈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로마시대에도 인구감소 문제가 심각했다. 200가지가 넘는 로마의 멸망원인 중에 인구문제도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라쿠스 형제가 10남매였듯이 기원전 2세기에는 다산(多産)이 일반적이었지만 기원전 1세기경에는 출산이 급격히 감소했다.
이때가 시이저가 등장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간통법과 혼인법을 제정해서 자유연애를 범죄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혼했거나 결혼하지 않은 독신여성에게는 상속을 금지하는 등 재산 소유를 제한했다.
이런 정책은 남자들에게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되었다.
같은 조건의 남자는 공직에 진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정책도 실효는 없었다.
근간인 자유민이 몰락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유민들은 빵과 서커스에 의지했고 출산율도 저하되었다.
그럼에도 로마는 스파르타와 달랐다.
아프리카인이 황제가 될 정도로 개방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500년을 더 유지했다.
우리도 인구감소를 많이 우려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고조(顧助, 보살피며 도와줌)라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결혼하지 못한 처녀를 조사해 그 연유를 기록한 후 혼인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능력이 있음에도 시집을 보내지 않으면 국문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부자들은 재산 감소를 우려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부양 능력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저출산 문제를 부유해져서 인구가 감소한다고 보는 것은 한 면만 본 것이다.
대부분은 양육 같은 경제 문제가 핵심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이나 이후나 변함없이 국가는 출산장려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2005년까지 산아제한에 예산 투입
최근 출산감소가 국가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아 제한을 했다고 호들갑이더니 이제는 온통 인구감소 걱정들이다.
노 대통령은 선거 당시 “아이는 제가 키워주겠다”고 했다.
출산장려의 핵심은 육아문제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이 현상을 편한 것만을 찾는 풍조로 돌리고 있다.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항상 엉뚱한 일을 벌인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다산왕 선발대회를 열었다거나 몇 푼의 보조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그런 발상에서 비롯된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다.
부유해지면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일면을 본 이야기이다.
최근 십수년간 러시아는 급격한 인구감소를 보이고 있는데 그 결정적 요인은 경제불안과 사회주의 시절 의료체계의 붕괴 등 사회불안 때문이다.
공동체의 활력과 인구증가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최근 프랑스가 저출산을 극복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의 저출산 정책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GDP의 3%를 사용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국방비가 GDP의 2.5%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노력이었던 셈이다.
저출산 극복은 좌우세력이 합의한 가장 큰 정책이었다고 한다.
단순계산으로도 신생아 1인당 3천만원 이상을 쓴 셈이다.
그럼에도 2005년까지 100억원이 넘는 산아제한 예산을 투입해온 정부는 아직도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고 국회는 바빠서 신경을 못쓰는 것 같다. 오호 통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