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적고 낮은산 많아 정겨운 지명줄줄 ‘수월암’은 암자에서 유래됐을 가능성 커

▲ 서탄면 수월암2리뒤 도도리마을뒷길
도도리는 거리미를 한자로 쓴 것

 수월암리는 서탄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다. 이 마을은 거리미(1리), 도도리(2리), 심교(3리) 등 네 개의 자연촌락으로 형성되었다. 20여 호가 모여 사는 거리미는 원씨, 윤씨, 이씨가 대성(大姓)을 이루고 산다. ‘거리미’라는 지명은 ‘큰길가(거리)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마을회관도 없고 주변에 공장설비공사가 한창이어서 자세한 내력을 조사하지 못했다.

도도리는 4, 50호가 넘는 큰 마을이다. 해방 전후에는 60호가 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으로는 거리미가 대표지만 호(戶) 수로 보면 도도리가 중심이다. 도도리는 ‘거르미’의 한자지명이다.

거리미가 ‘원수월암’으로도 불려지지만 ‘뒷거리미’로도 쓰이기 때문에 도도리는 ‘앞거리미’였로 불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1914년 이전 어느 학식 있는 선비가 길도(道)자를 써서 ‘도도리’라고 명명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명이 되었을 것인데 추정일 뿐 근거는 없다. 성씨는 곡산 강씨가 대성(大姓)이다.

토박이 강희분(82)씨에 따르면 곡산 강씨는 6백여 년 전에 입향하여 현재도 20호가 넘는 다고 하였다. 하지만 입향조나 그 후의 내력은 알지 못했는데 여성으로서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심교는 자연지명으로 ‘깊은다리’다.

이 마을은 본래 전주 이씨의 동족마을이었지만 최근 들어 타성이 많아지면서 의미가 퇴색되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위의 세 개 마을 외에도 1995년 도도리에서 분리된 마을이 하나 더 있다고 하였지만 답사는 못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진위현 서면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진위군 이서면으로 나뉘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월암리, 도도리, 종복리가 통합되어 수월암리로 개편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명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종복리’라는 마을이 현재는 없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 천재지변이나 미군기지확장과 같은 경우가 아니면 폐동되기 어려운데 아는 사람도 만나지 못해 답답한 마음이었다. ‘수월암’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예컨대 평택시사(2001)에는 “마을에 사는 젊은 과부가 홀로 긴긴 밤을 지새우기가 힘들어 냇가를 거닐다가 냇물에 비친 교교한 달빛에 취하여 “개울물[水]은 바위[岩]를 굽이쳐 흐르는데, 둥근 달[月]은 고요하다”라는 시를 읊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한국지명총람(1985)에는 “오산천 변에 달처럼 생긴 작은 산이 있어” 유래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거리미가 마을 앞으로 오산천이 흐르고 서북쪽으로 당산(堂山)이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하기는 하지만 이 같은 이유로 지명이 형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수월암’이라는 암자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은 이웃에 ‘절골’이라는 마을이 있고 옛부터 이 같은 이름이 암자 지명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서탄면 수월암3리 깊은다리마을

과부가 달밤에 놓았다는 깊은다리

 수월암 3리는 심교다. 심교(深橋)는 우리말로 ‘깊은다리’로 크고 작은 개울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발견되는 지명이다. 깊은다리는 서탄으로 가는 큰 길과 심교마을에서 나가는 마을길이 만나는 지점의 다리 밑에 있었다.

다리래야 큰 바위 몇 개 가져다 놓은 징검다리에 불과했지만 옛부터 한양으로 나갈 수 있는 큰 길이어서 사람의 왕래가 잦았다. 그러다 보니 다리주변에는 주막도 생겼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전설도 만들어졌다.

내용이 궁금하여 우연히 만난 주민 이기성(54)씨에게 물었더니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다만 ‘옛날 잡초가 무성하여 길이 없던 시절 한 과부가 달밤에 건너편 함박골에서 머리에 이어다 놓았다’는 이야기만 전해주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수월암리와 달빛은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바위를 이고 산길을 오가는 젊은 과수댁,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자꾸만 궁금해진다. 

  이기성(54)씨에 따르면 본래 심교마을은 북쪽 큰길가에 있었다고 한다. 그 때는 전주 이(李)씨를 중심으로 호(戶) 수도 150호가 넘었고 부자가 많아 근동에서는 가장 번성한 마을이었다.

심지어 주변마을에서 깊은다리를 지날 때는 말에서 내러 걸어 다닐 정도로 위세가 있었다고 한다. 위세가 있다 보니 두레의 배분도 높았다.

그래서 깊은다리 두레가 떴다 하면 주변 마을에서는 농기(農旗)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이를 어기면 치도곤을 당했다. 

 마을이 번성하려면 우물이 좋아야 한다. 깊은다리에는 향나무 옆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맑고 시원한 우물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도 ‘향나무 우물’이었다.

좋은 우물은 마을의 자랑이고 긍지였다. 가뭄에는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정월 지신을 밟을 때는 우물을 청소하고 가장 먼저 치성을 드렸으며, 동네 아이들이 더럽히기라도 하면 부모까지 불려와 혼찌검이 났다.

그런데 마을에 변고가 생겼다. 살인사건이 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목을 매고 죽는 일도 발생했다. 살인사건은 사람 죽는 일이 다반사인 요즘에야 예사로운 일이지만 옛날에는 마을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거듭되는 변고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을 등지기 시작하였다. 고향을 버리기 어려웠던 전주 이(李)씨 집안은 가까운 곳에 새로 마을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옛 영광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세월이 변하면서 주막도 사라졌고 깊은다리마저 7, 80년대의 경지정리로 없어져버렸다.    

▲ 서탄면 수월암2리 도도리 아랫말

 

▲ 서탄면 수월암2리 강희분씨와 동내사람들

당고개 넘다 여우에게 홀려 봤나?

 도도리 주민들과의 만남은 노인회 총무 소진형(70)씨를 통해서 이뤄졌다. 이 분은 25년 전에 이주하여 마을의 역사나 문화를 잘 알지 못했지만 열성만큼은 대단하여 바쁜 와중에도 필자를 마을회관까지 안내하는 배려를 해주었다. 마을회관에는 할머니들 몇 분이 눕거나 벽에 기대고 앉아 TV를 보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노인들 가운데 우간난(83)씨가 가장 연장자였고 서글서글한 노인회 부회장 전애란(71)씨 도 있었지만 기억력과 언변은 강희분(82)씨가 단연 으뜸이었다.

더구나 이 분은 마을에서 태어나 동네 총각과 혼인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어 인터뷰 대상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을의 내력을 대충 살핀 뒤 지명(地名)을 물었다. 마을 내력에 대해서는 남자 노인들만큼 정보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여자 노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장정 한 몫의 노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명에 대해서는 남자노인들 못지않은 기억을 갖고 있다.

  수월암 2리 도도리는 크게 아랫말, 중간말, 늠말로 나눠진다. 왜 아랫말이 아니고 늠말이냐고 물었더니 옛날 큰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산과 당고개는 거리미와 경계에 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거리미에서 도도리로 넘어오는 고개인데, 자동차나 가로등이 없었던 옛날에는 맹수들이 우글거리고 도둑이나 강도가 자주 출몰하여 밤에는 눈에서 불이 번쩍 나오다 끊어지는 여우에게 홀려 밤새 길을 헤매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오산장이나 서정장을 보고 밤늦게 고개를 넘어오는 사람이나 학교 갔다 늦게 오는 학생들에게는 공포의 고개였다. 공포는 다양한 체험을 낳고, 작은 체험은 이야기꾼의 입을 통해 구전설화가 된다.

때론 하릴없는 긴긴 겨울밤 동네 사랑방에서 술추렴하는 사람들의 안주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강희분씨는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며 적당한 선에서 말을 끊었다.

 도깨비굴은 도도리 서쪽 모퉁이에 있는 지명이다. 옛날 이곳은 도깨비 소굴이었다. 요즘사람들에게 도깨비는 전래동화에서나 만나는 가상의 존재지만 옛날사람들에게는 삶을 함께 하는 이웃이었다.

어릴 적 강희분(82)씨 집은 도깨비굴 옆에 있었다. 8, 9살쯤 되었을 때로 기억하는데 한 번은 집 옆에 디딜방아를 놓았더니 밤새 가지고 놀아서 잠을 자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필자도 초등학교 시절 장승백이라는 고개에서 도깨비에게 홀려 고생했던  무용담을 무시로 들었던 사람이고 보면 분명 실재했으리라는 믿음이 조금씩 돋아난다.

  수월암리 일대에는 산이 많고 들이 적은 편이다. 그래서 옛부터 밭농사가 발달하였고 이름 붙여진 골짜기도 많았다. 도도리 서북쪽의 마새울은 옛날 산과 밭이었다. 이곳에서 마을 쪽으로 내려오는 골짜기는 뒷굴이고, 뒷굴 아래의 들은 ‘어거지’다. 또 내천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들은 원마틀이며, 이곳에 방죽이 있어서 그 아래쪽은 ‘방죽아래’로 불려진다. 여수애는 원마틀 위의 밭농사지대다. 여수란 ‘여우’의 사투리인데, 이곳에는 죽은 아이를 묻은 애장이 많아서 여우가 자주 출몰하였다.

  또 당고개 아래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김양굴이고, 도도리 동쪽 야산은 배욱재다. 배욱재 아래에는 돌맹이가 많아서 돌팍재라고 붙여진 고개도 있는데 이곳에는 경기민중연대 의장이며 시인인 한도숙씨의 ‘돌팍재 농원’이 있다.

그 밖에도 깊은다리에는 함박산도 있으며, 도도리에는 앞산, 앞산고개가 있고, 유래를 알 수 없는 도간재라는 지명도 있다. 이같이 숨이 찰만큼 많은 지명에는 사연도 가지가지고 전설도 다양하다. 그것은 민중들의 삶이 간단치 않았음을 말하는데 풀어줄 길 없는 필자는 함께 한숨만 내 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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