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영광 국회의원 아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5-11-05     김윤영 기자

오늘의 평택을 있게 한

진정한 정치인을 기억해주길…

1995년 3개 시군 통합의 주역이었던 
고 김영광 국회의원의 아들이 전하는 
의미와 앞으로 평택이 나아갈 방향 

평택시 통합 30주년을 기념하는 ‘EVERYONE 축제’가 10월 25~26일 개최됐다. 이날 1995년에 3개 시·군 통합추진위원회를 이끌었던 김영광 총괄추진위원장, 김찬규 공동위원장, 이취우 한덕수 우종갑 조중환 천낙범 정수일 유동희 이민관 이규천 유흥석 나운학 박옥란 전진규 박남규 위원에게 감사패가 수여됐다. 2010년 별세한 김영광 위원장의 감사패는 그의 첫째 아들인 김성수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에게 전달됐다. 10월 30일 그가 근무하는 한양대를 찾아 김교수를 만났다.

고 김영광 위원장은 1931년 송탄 지산동에서 태어나 수원농고와 고려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정회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해 평택·송탄 11대(한국국민당)와 14대(민자당, 송탄·평택) 의원을 역임했다.

김성수 교수는 “선친을 대신해 감사패를 받던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벅찬 감동과 깊은 아쉬움이 교차했다”며 “한 가장의 헌신과 한 정치인의 결단이 30년 세월을 넘어 지역사회의 역사로 새겨졌음을 보여주는 감동의 순간이었다”고 밝혔다.

 

평택시민에게 본인을 소개해달라.

어린 시절 지산동 우곡마을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셨고, 어머니는 병원을 운영하셨는데 제 밑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이 태어나자 부모님은 고향에 사시는 고모할머니와 친척들에게 저를 맡기셨다. 우곡마을은 광산김씨가 세거해 살아온 집성촌으로 광산김씨 집성촌 비석과 아버지 공적비를 찾을 수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송북초등학교 지나 우곡마을 가는 길, 제가 자랐던 고모할머니 집 등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1982년 한양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고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모교인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2012년에는 아프리카 관련 정책이 미비한 국내 현실의 한계를 수정하고 보완하기 위해 한양대 유럽아프리카연구소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평택시SDGs·ESG포럼과 평택상공회의소와 협력해 평택지역 기업에 ESG 경영을 통한 유럽·아프리카 진출 전략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평택시 3개 시군 통합을 정치적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통합으로 도시 규모가 커지고 인구가 증가해 평택이 경기 남부권의 경제 허브로 성장할 가능성을 확보했다. 허브 역할을 하려면 인프라 등을 충족해야 한다. 인구가 증가한 만큼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양해지고 커지게 된다. 정치와 경제가 연동되는 것이다. 인구 증가는 유권자 수 증가다. 규모를 키워 경제적 조건을 갖춘 도시에서 많은 유권자가 국가의 백년대계를 이룰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한 정책을 구현하면 정치적으로 혜택 받을 기회도 늘어나게 된다.

평택시가 3개 시·군 통합으로 경기남부권 거점도시로 성장해 정치적 혜택을 받을 기회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는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 가능성을 품고 있고, 성장동력을 선택하게 됐다는 의미다.

통합 전에 송탄지역은 주한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였다. 지역 발전을 위해 미군기지 옆에 반도체·수소와 같은 첨단산업을 유치할 수가 없는 노릇 아닌가. 통합으로 송탄이 아닌 다른 권역에 첨단산업공장이 들어서고 이런 기회 요소를 잘 엮고 협력해 도시 전체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송탄 발전으로 이어진다. 국내뿐 아니라 국제 여건을 세심하게 파악하고 시민 목소리를 최대한 수렴해 평택 전체의 성장 모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통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고 김영광 의원은 3개 시군 통합추진위원장으로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30년 전 통합 당시 특히 송탄지역에서는 송탄이라는 이름이 평택에 묻힌다는 이유로 반대가 극심했다. 송탄은 미군기지가 있는 기지촌, 유흥지역 등의 이미지가 강해 송탄 주민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이나 소외감이 큰 상황이었다. 송탄 출신인 아버지를 좋아하고 지지했던 분들은 기대한 만큼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송탄 출신이라 지지해줬는데 송탄을 팔아먹는다는 배신감을 느꼈을 거다. 통합을 반대하는 주민이 화형식을 열고 송탄을 평택에 팔아넘긴 매향노(賣鄕奴)라 비난했다. 하지만 미래를 보고 통합의 길로 가야 한다는 분이 더 많았다. 당시 송탄이 제법 규모 있는 중소도시였지만 위치나 도시 구조 측면에서 계속 발전하기 어려웠다. 통합이라는 큰 비전이 필요했다. 도시 규모가 어느 수준 이상이 되어야 발전하고 성장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지는 누구보다 깊은 고뇌와 책임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셨다. 눈앞의 이익보다 먼 미래를 바라보셨다. 우리 고장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후손들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합이 필요하다는 신념이 확고하셨다. 지역균형 발전에 아쉬움이 있고 주민정서통합의 길이 아직 멀기 때문에 지역을 이끌어가는 지도층의 각성이 필요하고 시민화합과 협력만이 지역과 시민이 살 길이라고 하셨다.

정치인으로 이런 선택을 하기 쉽지 않다. 자신의 정치 기반을 흔들고, 나아가 낙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의원 배지를 잃더라도 지역의 미래를 얻어야 한다”며 통합의 길을 걸으셨다. 지역을 진심으로 사랑한 한 사람의 헌신이자 공익을 위한 결단이었다고 본다.

 

통합 30년이 지났지만 권역 갈등이 아직 남아 있는데.

송탄 사람이 보기에 “평택에 우리가 먹혔다”는 인식이 남아 있고, 평택이라 불리는 남부권 사람은 “송탄과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과 인식은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고, 자주 만나 소통하고 새로운 네트워크가 생겨나면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20년 전만 해도 대학 신입생들이 티케이(TK) 출신, 전주 출신, 광주 출신 등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요즘 학생들은 호남과 영남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없다. 이처럼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 상징적 가치를 부여해 차별화하려는 경향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다만 권역별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통합 이후 “평택에 우리가 먹혔다”며 송탄 주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다. 감사패를 받을 때 아버지와 함께 통합을 추진했던 박옥란 의원을 뵈었다. 그분도 화형식을 당할 정도로 비난을 받았던 분이었다. 통합추진위원을 했던 분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통합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른바 ‘지역 패권’이라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권역별 감정을 강화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행태가 당연시된다면 공동체로 성장하지 못하고 ‘패거리’에 머무른다. 송탄의 발전, 평택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통합의 역사적 의미와 경제적 효과 등을 지역에 계속 공유하고 공감대를 굳건하게 형성해야 한다. 거시적 시각으로 하나의 평택을 바라보고 나아가다 보면 권역별 감정이 평택에 대한 자부심으로 승화할 수 있다.

 

고 김영광 국회의원은 의원 시절부터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에 나서 1984년 순국선열유해 한국봉안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97년부터 안의사숭모회 부이사장으로서 유해발굴 조사에 앞장섰다. 사진은 중국 북경에서 안중근 의사의 손자 안웅호 박사를 만났을 때 찍은 것이다. 왼쪽부터 김성수 교수, 안웅호 박사이고 왼쪽 네번째부터 고 김영광 국회의원, 안웅호 박사의 어머니 정옥녀 여사다.

정치인의 아들이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는 것은 정치에 뜻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는데.

대학에 입학한 80년대 초반은 암울한 시대였다. 현실정치보다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정책을 연구하고 정치적 방안을 찾아내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정치인이라고 해서 저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1996년 제15대 총선 낙선에 아쉬움이 크셨다. 건강이 점점 안좋아지고 현실정치를 다시 하기 쉽지 않겠다는 판단을 하시고는 제게 총선 출마를 권유하셨다. 저는 통합의 의미를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하고 이용하는 세태에 분개해 아버지의 뜻을 이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공천 신청도 하고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선거를 준비해나갔다.

그런데 선거운동이 본격화되기 직전 아버지가 숙환으로 별세하셨다. 삶의 기둥 하나가 사라졌다고 할까. 큰 충격을 받았다. 정치외교학을 공부한 아들이 정치인 아버지의 뜻을 이어 정치에 입문하려 했는데 정치의 길을 권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허탈했다.

제가 가야할 길을 숙고했다. 아버지는 사필귀정을 강조했지만 저는 수긍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 사람이 떠나고 난 다음에 남들이 인정해준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현재 사람 마음에 울림을 주고 지역을 발전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제 질문을 받은 아버지는 그냥 웃으셨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학교에서 좋은 인재 많이 키워내고, 좋은 정책을 알리는 칼럼과 책을 많이 쓰면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나라 정치에 기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10월 26일 평택시 통합 30주년 기념식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감사패를 받았던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그 어느 때보다 벅찬 감동과 깊은 아쉬움이 교차했다. 그 감사패는 진실은 결국 제자리를 찾는다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증명이라 생각한다. 한 가장의 헌신과 한 정치인의 결단이 세월을 넘어 지역사회의 역사로 새겨지는 감동을 느꼈다. 하늘에서 이 모든 모습을 바라보시며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실 아버지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 미소는 아마도, 자신이 믿고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기쁨의 표정일 것이다.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준 평택시민 여러분과 30년 전 아버지와 고난의 시간을 함께 헤쳐온 통합추진위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평택시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늘 평택을 가능하게 한 아버지의 용기와 사랑을 떠올리며 진정한 정치인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분열보다 통합을,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미래를 우선하는 정치와 시민정신이야말로 아버지가 평생 몸소 보여준 가치였다. 그 뜻이 이어져, 평택을 넘어 대한민국이 더욱 성숙하고 따뜻한 공동체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