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국인 손재 이준
평택읽기
고려대 신소재화학과 명예교수
경주이씨 국당공파 혜은공종중 회장
손재 이준(1570~1599)은 퇴우당 이정암(1541~1600)과 파평 윤씨 윤광부의 따님 사이에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오재 이탕(1507~1584) 인데 기록에 따르면 500여 명의 제자가 그의 문하에서 배웠고 그중 윤우신·권율 등 30여명이 과거에 급제했다. 이준은 인물이 출중하였고 이탕의 제자 지사 윤우신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그는 이탕의 장손 이정함(1534~1599)이 손이 없자 이탕 집안을 이끌어갈 적임자로 선택받아 백부 이정함의 양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시에 도성에서 벼슬살이 하던 이준은 역시 도성에서 벼슬살이 하던 생부 이정암과 함께 이동하여 연안지역에 이르러 연안성을 수성하고 연안군민을 지켜내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정암이 남긴 난중일기 <서정일록>에 가장 많이 26회 나타날 만큼 이준이 이정암을 근접에서 도왔다. 그 자신도 당시 전투상황 현장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임진일기>라는 난중일기를 별도로 남겼다. 이 일기에는 왜적들이 약탈과 살육을 일삼고 백성들은 방향을 잃고 피난가며 관료 가운데 관직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왜적의 편에 서는 자가 있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가치질서가 파괴된 전쟁통에 백성들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취한 그의 결연한 의지와 난리 초기 급박한 상황에 처한 부모형제의 수난사도 적혀있다.
임진왜란 육전 3대첩 가운데 하나인
연안대첩 이끈 이정암과 그의 아들 이준,
관군에게 군량미 공급했던
양부 이정함 기리는 학술대회가
10월 3일 송탄동 방혜동마을에서 열릴 예정
이준의 임진일기에 대해 강원대학교 정용건 교수는 “이준은 다른 의병들이 연안에서 농성하기로 한 이정암의 결정에 반대하였을 때 유일하게 그를 옆에서 지지하고 권면하였으며 왜적이 임박해 와 성이 위태로워졌을 때도 동요하던 장병들과 달리 끝까지 부친 곁에 남아 지킬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하여, 이준은 성내의 의병들과 더불어 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왜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라고 그 내용을 요약하였다. (정용건,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평택지역의 임진전쟁사 연구, 106, 국제대학교, 2024.10.3.) 연안전투 대승 소식을 접한 선조가 이정암의 아들 가운데 한 명에게 6품직을 제수하도록 특명을 내리자, 조정에서는 이준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이준은 자기 맏형 이화도 공이 있다며 맏형에게 김천(당시 지례)현감 자리를 양보하였다고 하니 그는 어버이를 섬기고 형제 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며 나라와 국민에 충성과 신의를 다하는 효제충신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참한국인의 귀감이라 하겠다. 사후 그는 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다. 1608년에 백사 이항복이 지은 연성대첩비 전문에 그의 생부, 의병장들과 함께 그의 이름이 인용되어 있다.
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1702) 3월 27일 기사에 “황해도 연안(延安)의 사민(士民)들이 이정암(李廷馣)의 사우(祠宇)를 세워서 같은 시기에 성(城)을 지킨 사람으로 조광정(趙光廷)·송징윤(宋徵潤)·장응기(張應祺) 및 이정암의 아들 이준(李濬)을 배식(配食)하는 것으로 상소하여 은액(恩額)을 하사(下賜)하기를 청하니, 해조(該曹)에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이후에 복주(覆奏)하니, 허락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임진왜란 종료 후 이 나라에 머물러있던 명나라 장수로부터 욕을 당한 것이 큰 원인이 되어 이준은 30세에 요절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강하지 못하면 외국에 당하고 짓밟히고 힘들게 살며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주 만에 그의 양부 이정함도 세상을 등지게 되니 이 나라는 참한국인 둘을 연이어 잃게 되므로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8월 20일 자 본지에 참한국인 이정함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평택에 거주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의 묘가 평택에 있고 생부 이정암의 사류재집과 숙부 이정형의 지퇴당집에 각각 실려있는 글들로 미루어볼 때 그가 평택에서 이정함과 함께 상당기간 거주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조부의 사당이 있는 평택에서 양부와 함께 살았던 평택인이다.
하여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참한국인 이준과 임진왜란 시 관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며 참한국인의 삶을 살았던 그의 양부 이정함을 기리고자 연안대첩 발발일인 10월 3일에 그 후손들이 400년 넘게 살아온 평택시 송탄동 ‘방혜동마을’에서 ‘임진전쟁 선무원종공신 7주갑 (420주년), 임진전쟁 육전 3대첩 연안대첩 433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