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장군 순국 428주기, 제향 거행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 강사로 친필서한 간찰 연구발표회도 “편지 통해 인간적 면모 발견”

2025-09-10     한아리 기자

원릉군 원균장군을 기리는 순국 428주기 제향이 9월 6일 도일동 원균사당에서 열렸다. 이날 제향에서는 최근 발견된 원균장군의 친필서한인 ‘간찰(편지)’ 강연회도 진행됐다.

행사에는 홍기원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평택시갑), 김재균 경기도의원, 이종원·이관우·소남영 평택시의원, 원유철 전 국회의원, 김상모 평택시 문화국제국장, 오중근 평택문화원장, 김광태 평택시민단체협의회장, 이광섭 평택현역사문화마을시민모임 대표, 김연진 원균학당 대표, 최영진 평택국가유산지킴이 회장, 전명수 평택시민환경연대 공동대표, 이계은 함평이씨종친회장, 배옥희 전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김종기·김훈 금요포럼 공동대표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1, 2부로 나눠서 진행됐다. 1부 제향은 해금 추모연주와 선조가 원균장군의 영전에 내린 제문인 치제문 낭독, 제례봉행 순으로 진행됐다.

이어진 2부 연구발표회는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가 ‘원릉군의<간찰> - 원릉군의 참모습 간찰에서 재발견하다’를 주제로 ‘원릉군의 편지, 1591년 여름’ 강연을 진행했다.

백 교수는 원균의 편지에서 확인된 사실을 5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원균의 편지는 수원도호부 고양동에 사는 절친에게 답장으로 보낸것이다. 절친의 이름은 아마도 소눌 또는 최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이 편지를 쓴 시점은 24년(1591) 음력 6월로 짐작된다. 그 당시 원균은 함경도 종성부사를 그만두고 서울 건청동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셋째, 선조 23년에는 가을에 경기도의 벼의 작황이 좋지 않았으며, 그 이듬해 서울에 사는 사람이나 모두 연명하기 어려웠다. 넷째, 당시에 원균의 아들 원사웅은 이미 장가들어 처가인 능성구씨 집안에 동거하고 있었다. 다섯째, 원균은 유교적 교양이 높은 명가자제로 한문에 능통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명료하면서도 격조 높은 문학적 표현으로 서술할 줄 아는 선비이자 무사였다.

백승종 교수는 “편지를 통해 원균의 인간적인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며 “단숨에 붓을 휘둘러 쓴 글씨를 보면 그는 활달하고 거칠 것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고 글의 흐름과 내용을 음미해 보면, 마음이 따뜻하고 속정이 깊고 조심스러우며 문장력도 탁월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