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국인 퇴계와 퇴재
평택읽기
고려대 신소재화학과 명예교수
경주이씨 국당공파 혜은공종중 회장
퇴계 이황(1501~1570)은 43세(1543) 때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할 계획을 세웠고 46세에 고향 안동(당시 예안)으로 돌아와 50세에 이르러 고향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축조하고 만년의 장수처(藏修處)로 삼았다(강지선, 동방한문학, 44권, 31~64, 2010). 한서암으로 이사한 해에 전원시인 도연명의 음주시에 화답하다 라는 20수를 지었는데 그 19번째 수인 <화도집음주(和陶集飮酒)>에 “소원선인다(所願善人多, (나의) 소원은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를)”는 구절이 있는 바 이것이 곧 그의 가르침의 상징적 글귀로 회자돼 오늘날 안동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퇴계 이황 선생 좌상에 새겨져 있다.
퇴재 이정함(1534~1599)은 오재 이탕(1507~1584)과 그의 첫 번째 부인 전주이씨 연풍부수 이강의 따님 사이에 1남으로 태어났는데 그가 3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1558년에 사마양시에 급제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을 하였지만 곧 벼슬을 떠나 외가인 평택(당시 진위) 전주이씨 마을로 돌아와 자연과 벗하며 농사 일을 하고 살았다. 평택현감 노한우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그에게 7살 15살 아래의 두 아우 퇴우당 정암(1541~1600)과 지퇴당 정형(1549~1607)이 있었는데 아래글을 보면 퇴재는 동생들을 잘 챙겼고 이들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퇴재 이정함은 임진왜란 당시
동생 이정암과 양아들 이준이 연안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으로 활동하도록 기여
퇴재는 또 평택에서 관군에게 군량미
공급한 공으로 임금에게 오위장을
제수받은 인물로 귀하고 선한 삶
몸소 실천한 참한국인의 원형
퇴우당은
“나는 아장아장 어릴적부터 나보다 일곱살 많은 우리 형 정함이 내 손을 잡아주면 나는 형의 뒤를 따르며 컸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셨고 손잡고 대문밖 개울가에도, 업어도 주고 보듬어도 주고 공부도 가르쳐 주고...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형의 뒤를 따르며 형을 존경했다.” (사류재집, 영암 망호정마을 이승주 역)
라는 시를 지어 퇴재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존경심을 표현했고
지퇴당은
“형님의 생애를 길이 생각해 보자니 마치 꿈속에 있는 듯 멍합니다. 학문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 상사(上舍)에 올랐으니, 또한 부모를 드러내셨습니다. 다만 작은 관직으로는 뜻을 펴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사직하고 옛 마을에 돌아와 지냈습니다. 이후 농사일에 힘을 쏟아 집안을 윤택하게 하여 남는 재력으로 전란 시 군대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비용을 보조하였으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높은 직질에 발탁하여 옥 안장 끈과 푸른 언치에 안장과 고삐가 환히 빛났으니. 나이가 60을 넘어서도 평안하고 강성하여 복을 영구히 누리시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정용건,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평택지역의 임진전쟁사 연구, 104~105, 국제대학교, 2024.10.3.)
라는 글을 남기어 형 퇴재를 기리며 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퇴우당과 지퇴당은 그들의 형 퇴재의 평택 농장을 자주 찾아 시와 글을 남겼는데 그 내용이 그들의 후손들이 발간한 문집 사류재집과 지퇴당집에 각각 포함되어 전한다.
1592년 당시 59세였던 퇴재는 왜의 침략으로 수도 한양이 함락됨에 서울서 벼슬살이 하던 양아들 이준에게 역시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그의 아우 퇴우당과 함께 이동하도록 하여 퇴우당 정암과 양아들 준이 연안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할을 하는 데 기여하도록 하였다. 한편 퇴재 자신은 거주지 평택에서 관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고 그 공으로 임금으로부터 오위장을 제수받았다.
또한 왜의 분탕질로 서울의 선대 사당이 소실되자 1594년에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진위에 신위를 다시 제(題)하여 봉안했다. 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이 그의 효심을 꺾지 못했다.
퇴계와 퇴재는 속인(俗人)이 아니었다. 퇴계가 “소원선인다”를 설파하며 학문에 정진했던 분이라면, 퇴재는 귀하고 선한 삶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참한국인의 원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외아들도 아닌 양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노후의 자신은 군량미를 공급하며 국가를 사랑하는, 또한 부모에게 효를 다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그의 삶은 숭고하고 고결하다 하겠다. 전란이 끝난 1599년 양아들 준과 퇴재는 차례로 세상을 떠났고 두 분 모두 평택에 잠들어 계시다. 구한말 우당 이회영(1867~1932)은 1914년 5월 30일 자 국민보에서
“...한국의 요구하는 바는 정치가 군사가 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니 이가 누구인고 하니 곧 개인의 천직을 다하는 자, 사회에 적임을 행하는 자, 국가에 의무를 다하는 자 ...”
라고 하였는바 퇴계와 퇴재 같은 참한국인을 염두에 두고 하셨던 말씀이었음이 아니었을까. 평택이 참한국인의 고향이다.
* 글 작성에 도움을 주신 도산서원 권오추 강독유사와 고려대 이진한 교수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