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로 만나는 평택섶길 풍경  31

2025-05-07     평택시민신문

시내길 여섯 번째 이야기, 평택의 옛날 사업가들

이계은 시민기자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 글을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시내길을 지나오며 평택의 옛날 사업가들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해방 이후 6.25 전후에 사업을 일으켜 활약했던 사람들 이야기다. 그들은 근면함에 더해 앞날을 보는 안목과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운도 따랐던 사람들이다.

동일목재는 평안도 출신 김덕윤이 창업했다. 부인과 아들 친척 몇과 함께 내려온 그는 옛날 상업은행 뒤편 천여 평 부지에 자리 잡았다. 60~70년대 지붕개량 등 새마을사업과 경부고속도로 평택 구간 현장의 건설경기 호황으로 사업이 번창하며 거래 은행의 적금 규모가 ‘무서울 정도’로 늘어나는 큰 손님이었다. 그는 중요한 일로 사람을 만날 때면 미리 사전 연습까지 하는 세밀한 사람이다. 70년대 초 그는 지역의 상공인들을 규합해 ‘평택상공회의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다. 10원 한 장을 허투루 쓰는 법 없는 그였지만 현장의 인부들을 우대하며 보름에 한 번쯤은 특별식을 장만하여 먹이곤 했다. 또, 형편이 어렵지만 공부잘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졸업하면 채용하곤 했다. 결국 그는 동일공고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아 기술 인력을 키웠다. 지금은 80대 후반의 아들 김광복이 재단 이사장을 맡아 부친의 뜻을 이어간다.

중앙정미소는 원평동에 있었던 평택에서도 제일 큰 정미소였다. 송탄의 정미소 재벌이던 유인흥은 1944년생 아들 유재호가 군에서 제대하자 그 정미소를 맡긴다.

그는 이미 1961년경 아들이 경복고 2학년 시절 학생 신분의 아들에게 택시 10대를 사주어 영업을 맡겼었다. 당시 수입차밖에 없었기에 서울에서도 택시가 귀하던 시절이다. 학업과 사업을 병행시켰던 셈인데 보통 사람이 보기엔 어이없지만 아들을 큰 사업가로 키우기 위한 나름 담금질이었다. 아들이 대학 때까지 운영하던 택시들은 군에 입대하며 처분했는데 몇 년을 굴렸던 택시들은 살 때보다 10배의 값으로 팔렸다. 중앙정미소는 그 돈으로 사놓은 세 번째 정미소였다. 영단정미소(營団精米所, 정부 양곡을 전문으로 도정하던 곳)였던 그곳은 가동되는 대로 돈이 쌓였다. 정미소는 나중에 아파트단지 건설사업에 수용되었다.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거두어 평택·송탄의 최고 부자 반열에 오른 유인흥은 큰 사업가들과 교유하며 큰돈을 빌려주곤 했다. 동일목재도 그중 하나였다. 유인흥은 생전에 큰 땅을 처분해 그의 이름을 딴 ‘인흥장학회’를 설립한다. 어렵고 성적 우수한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함이었고 근처 학교에 피아노를 사주는 등 기부도 많이 했다. 통합 평택시의 문화원장을 역임했던 아들 유재호는 스스로 자신을 평했듯 거침없고 꾸밈없는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다. 하지만 일찍 만져본 돈과 이른 나이에 놀아본 경험은 오히려 예방주사가 되었음일까. 그는 유산을 그리 축내지 않고 장학회와 기부활동을 늘리며 부친의 유지(遺旨)를 이어가고 있다.

 

문화철물점은 지금의 호박나이트 자리였다. 충청도에서 올라온 키 작은 주인 정홍구는 근면검소한 사람이다. 철물사업은 팔면 남고 재고가 쌓여도 값이 올라 남는다. 선돈을 내야 샀던 시멘트는 대리점을 겸하니 그야말로 화수분이다. 그는 돈이 모이는 대로 주변 땅을 사들이고 현금은 대기 중이다. 그 집의 안방 장롱에는 돈 보따리 여러 개와 채권목록이 정돈되어 있다. 주변 장사하는 이들에겐 은행 대출 창구인 셈이었다. 그들 부부는 많이 베풀기도 했다. 철물점 일을 돕던 처사촌에겐 볼트 가게를 차려줘 부자가 되게 했고 궁핍한 일가 노인에게 떼어준 원곡 초입의 땅 2천여 평은 금싸라기 땅이 되어 그 자손들이 잘살게 되었다.

부인은 말년에 천주교재단 수녀들이 운영하는 요양시설에 의탁하며 수천 평의 땅을 기부하기도 했다. 80세의 작은 아들 정영세는 부친의 남은 유산을 이어받아 평택역 앞에 큰 건물을 보전하고 있다.

황해모터스는 통복시장 오거리 1번국도와 38국도 사이의 모서리에 있었던 평택 최초의 자동차 정비공장이었다. 왜소한 체격의 주인 전낙규는 황해도 출신의 부지런하고 검소한 사람이다. 인자했던 부인과의 슬하에 1남4녀를 두었던 그는 사업이 번창하며 서울 퇴계로에 빌딩을 사놓는 등 돈이 모이는 대로 재산을 장만했다. 그는 45년생 큰딸의 과외지도를 맡던 명문 의대생을 지원하여 사위 삼았지만 딸은 출산 중 사망했다. 금이야 옥이야 키웠던 49년생 아들은 아버지와는 품성이 달랐다. 닭싸움 도박에 심취했던 그는 부친의 눈 밖에 나며 지원이 끊기자 부친 소유의 배 과수원 창고에 몰래 화물차를 대고 저장 중인 배 상자를 실어다 팔아먹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 부친 전낙규가 사망한 후 여동생들과의 재산분쟁으로 가업은 중단되었다. 지금 그 아들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화예식장은 서정운이 창업했다. 제대로 된 예식장이 없던 시절이다. 그는 고물수집 등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지만 이재에 밝고 시류(時流)를 읽는 안목이 있었다. 1번 국도변의 예식장 본관에 이어 건너편에 신관을 짓고 나중엔 카바레로 꾸민다. 예식장도 잘되고 캬바레도 잘되었다. 특히 통복천 건너 국도변의 자동차 부속 가게는 그중에서도 가장 잘되는 자금 조달처였다. 미군 부대와 비선을 통해 들어오는 부품들은 들여온 가격의 열 배 정도에 팔려나갔다. 개를 좋아했던 그는 잘생긴 도사견을 보면 비싼 값에라도 사곤 했다. 전국 투견대회를 유치하기도 했던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2남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사업을 이어줄 만하기 전에 그는 사망한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의 두 아들은 방탕한 생활로 경쟁적으로 쓰기를 많이 했고 어디서부터인지도 모르게 차례로 무너져 버렸다. 지금은 두 아들 모두 죽고 없다.

평택도축장은 도일천변의 칠괴동 논 가운데에 예산 출신의 김병안이 지었다. 지금이야 자동화시스템이 되어 있지만 그 시절 도축장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듯 불법이 일상이었다. 그는 그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와 줄이 닿았다. 뒤를 돌봐줄 권력의 힘이 필요했던 거다. 돈을 수없이 벌었던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된다.

그 후 10.26 사태가 벌어지고 그는 서서히 몰락한다. 그를 회고하던 한 사람은 “그때 멈추고 남은 것 정리해 살아도 충분했는데…” 하며 아쉬워한다. 그 후 그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지만 하는 일마다 뻐그러졌다. 체납된 세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여기저기 수많던 재산들은 도미노처럼 넘어갔다. 그가 말년엔 의탁할 집 한 칸이 없었다. 예전에 그에게 신세 졌던 사람들은 대개 외면했다.

 

꽃이 지면 새로운 꽃이 피어나듯

부자 3대 가기 힘들다는 옛말처럼 부를 대대손손 이어가기는 힘들다. 대개 불민(不敏)하고 방탕한 자손 대에서 그 고리가 끊어진다. 당사자들에게야 안타까운 일이지만 부자 망하는 얘기는 호사가들에겐 제일 흥미로운 얘깃거리다. 하긴, 요지부동으로 부와 빈곤이 대물림된다면 희망이 없는 세상으로 그도 안될 일이겠다. 뒤웅박처럼 엎어지고 잦혀지며 새로운 팔자로 일어나는 세상이기에 사는 재미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봄, 목련꽃이 진 후 벚꽃이 피었다가 또 진다.

이번엔 이팝꽃과 아카시꽃 차례다.

제철이 되면 어김없이 피고 지는 꽃들이

세상살이의 이치를 느끼게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