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평택이 낳은 한국 민속음악 근대화의 선각자 지영희 명인을 찾아서 1
1975년 하와이로 떠난 내셔널 트레저
1909년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에서 태어난 지영희 명인은 민속음악 근대화의 선각자로 알려졌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보유자로 인간문화재가 되었으나 1974년 새로운 국악단체의 설립을 주도하다 당시 국악협회와의 갈등으로 1975년 미국 하와이로 떠나면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취소되었다.
50년이 흐른 2025년 현재 평택시민은 지영희라는 예술인을 알지 못하고, 시나위가 평택의 문화유산임을 인지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지영희 명인의 업적은 잊거나 놓아버리기엔 너무도 찬연했다. 당연히 평택문화의 맥으로, 평택의 대표문화로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때 오랜 기간 평택시청에 근무하며 지영희 명인의 업적을 계승·발전시키는 토대를 닦아온 오민아 작가가 미국 하와이 현지를 다녀와서 평택의 보물을 새롭게 발견한 감회를 글로 보내왔기에 2회에 걸쳐 게재한다.
우리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음악을 갖고 있다. 우리 전통음악 시나위이다. 시나위는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음악이다. 함께 모인 사람들과 마음을 맞추고 그 순간의 마음을 태워 음악으로 폭발시킨다. 지금 처한 상황을 이겨내고 더 잘 살아내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런 민족성은 끈덕지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의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도 시나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함께 모인 사람들은 어느 편이든 저마다 염원을 외치고 즉흥적으로 노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이런 독특한 우리 음악이 50년째 명맥이 끊어져 있다. 시나위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언뜻 보기에는 낡은 것이니 새로운 것에 밀려서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시나위처럼 즉흥 음악으로 알려진 서양의 재즈는 지금까지 잘 이어져 오고 있다. 흑인들이 노예로 핍박받는 비통함을 담은 노래에서 시작해 지금은 고급스러우면서 대중적인 음악으로 잘 변형 성장했다. 우리의 시나위만 사실상 단절된 것이다.
시나위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지영희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영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시나위로 무형문화 이수 자격을 가졌다. 바로 이런 지영희가 사라지자 시나위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지영희가 왜 갑자기 사라져 버렸는지 그 이유를 찾는 것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지영희가 사라진 까닭
지영희는 1975년 당시로서는 매우 노쇠한 68세의 나이임에도 갑자기 하와이로 떠났다. 68년을 국악에만 전념하며 영어도 전혀 알지 못하는 그가 사방이 태평양 짙푸른 바다로 둘러쌓인 섬으로 간다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었으리라.
당시 지영희는 국내에서 탄탄한 국악 연구소를 만들고 싶어서 ‘한국민속예술연구원’을 설립했다. 국악을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곳이다. 국악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당시 6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 정치 모든 분야에서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당시 기득권 조직이었던 국악협회는 지영희가 새롭게 만든 연구원을 몹시 언짢아했다. 국악계의 일인자였던 지영희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 그래서 국악협회는 지영희가 활동을 못하도록 다각도로 훼방을 놓았다. 학교도 못 나가게 하고 방송 출연도 금지시키고 온갖 재판과 소송을 걸었다. 평생 음악이 좋아서 심취했던 지영희는 이런 시끄러운 나날들이 견디기 힘들었고 싸울 줄도 몰랐다. 그저 일단은 가족을 따라 하와이로 피난했다. 오해도 풀리고 조용해지면 다시 돌아올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길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올해는 평택 출신으로 불세출의
대한민국 국악인이자 무형
문화재 52호 시나위 보유자였던
지영희선생이 쓸쓸히 하와이로
떠난 지 50년이 되는 뜻깊은 해
그는 왜 68세의 나이에 하와이로
떠나 끝내 그곳에 묻혔는가
지영희와 함께 사라진
평택 시나위를 되살려 이제라도
평택의 정신 문화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지영희를, 그의 음악적 꿈과
좌절을 더 정확히 알아야한다
침묵의 첫 집
지영희가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자리 잡은 집은 크지는 않았지만 아담한 잔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서 매우 가까운 곳으로 차로 30분 거리이다. 지금은 많이 낙후돼 보이지만 조용하고 평안한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지영희는 홀로 국악 연주만 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꽃나무에 이따금 물을 주며 늘 무표정했고 말도 없었다고 한다.
하와이 공연의 시작
지영희는 첫 번째 집에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그 집에서 2년을 버티다가 매우 싼 집으로 이사를 했다. 생활고 때문이었다. 정부가 지원하는 저소득층 임대 아파트였다. 이곳은 주로 하와이 원주민과 필리핀 등 가난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다. 당시도 불안했지만 지금은 더 우범화되어 총기 사망 사건이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당시 외로운 이민자들끼리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다문화 공연행사를 자주 열었다. 이럴 때마다 지영희는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국악 공연을 해주었다고 한다.
마지막이 되어버린 세 번째 집
하와이 차이나타운에 있는 지영희의 세 번째 집은 하와이 정부에서 노인들에게 임대하는 시니어 아파트였다. 지영희는 가세가 점점 기울어 잔디 깎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파인애플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고국으로 가는 시일이 늦춰지니 지영희의 심신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는 자꾸 몸이 마르고 쇠약해져 활동도 드물어졌다. 그럼에도 혼자 집에 있을 때는 녹음기를 틀고 해금을 타거나 악보를 정리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고 한다. 끝까지 귀국의 꿈을 놓지 않았다.
지영희의 마지막 모습
지영희가 하와이에 있을 때 이미 이민을 온 한국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교민들 사이에서는 국보급 국악 명인이 왔다며 소문이 자자했다. 머나먼 이국의 섬에서 지영희가 국악을 연주하면 교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향수를 달랬다. 지영희의 신들린 연주 덕분에 한바탕 시름을 태우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영희가 얼마나 외롭고 억울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언젠가 지영희가 혼자 잔디밭에 앉아 하도 하늘만 보고 있길래 지나가는 교민이 물었다고 한다. 대체 왜 그렇게 하늘만 보고 계시느냐고. 지영희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저쪽으로 가는 비행기가 한국 쪽으로 가는 거야. 하루에 몇 대가 지나가나 세어 봤어”라고 말하더란다.
하지만 지영희는 어느 날 혼자 침대에서 내려오다 떨어져 다리를 다쳤고 입원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향년 71세 때였다. 대한민국 민속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인이 하와이 어느 후미진 노인임대아파트에서 그렇게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때 시나위도 지영희와 함께 묻혀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