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집 <시를 만나다>를 펴낸 시인 우대식
김해규의 문화살롱 ⑭
숭실대 국문과 다니던 시절
김현승 시인 기리는 ‘다형문학상’
수상하며 문재(文才) 인정받아
진위고 교사 발령 받아 평택과
인연 맺은 후 ‘현대시학’에 등단
시와 평론, 연구 활동 활발
박석수기념사업회 회장 맡으며
<박석수 시 전집> 발간과 각종
활동 통해 지역사회와 연대
도시의 규모에 걸맞는 문학적
성취가 부족한 평택에서
그의 다음 행보 기대
지난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놀라웠다. 우리 문학, 우리 문화 수준에 반신반의하던 사람이나, 언젠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한강 작가일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도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상을 휩쓸 때도, BTS가 연거푸 빌보드차트를 석권했을 때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이제 K-Culture는 K-POP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대식은 평택지역 문인 중에서 특별한 존재다. 그가 30년 넘게 평택에 거주하면서 이룩한 문학적 성취는 지역적 자긍심이 되기에 충분하다.
결핍은 창조의 산물
우대식은 원주 태생이다. 옛 주소로는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월송리가 고향이다. 우대식에게 ‘고향’은 어렴풋한 환상이거나 때론 막연한 정서였다. 농촌 출신의 아버지는 원주 시내 최약방 뒷집의 처녀와 결혼했다. 가정은 꾸렸지만 물려받은 전답이 없어 일찍부터 원주 시내로 나와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우대식도 원주 시내에서 태어났다. 몇 년 동안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날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이촌향도한 도시민에게 서울은 혹독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거여동, 천호동, 약수동, 금호동, 행당동을 전전했다. 달동네에 살면서 얼음장사도 하고 연탄배달과 노동일도 하였지만 궁핍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때는 ‘아버지는 평생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는데 왜 가난할까’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우대식에게 서울은 이중적 공간이었다. 성장기의 추억과 삶의 서사가 담긴 곳이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벗어나려고만 했던 모순된 공간이었다.
어디까지나 주변인이고 경계인이었던 우대식에게 원주는 정서적 안식처였다. 우대식은 방학 때마다 원주에 내려갔다. 원주에는 친척들과 외가 그리고 외할머니가 계셨다. 외할머니는 참 따뜻한 분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원주는 더욱 특별한 곳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분이었고, 외가는 상실감에서 오는 정서적 허기를 채울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고향에 대한 정체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원주에 대한 정체성은 시인으로 등단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아내도 없이 청소년기의 두 아들을 건사하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아들 둘을 챙겼다. 노동일을 하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아침마다 도시락에 반찬 두어 가지와 흰쌀밥을 꾹꾹 눌러 담아 아들의 도시락을 챙겼다. 우대식이 쓴 ‘아버지와 쌀’이라는 시(詩)에는 이른 아침 자식들을 위해 밥을 짓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버지가 쌀을 씻는다/ 쌀 속에 검은 쌀벌레 바구미가 떴다/ 어미 잃은 것들은 저렇듯 죽음에 가깝다(중략) / 꾹꾹 눌러 도시락을 싼다/ 빛나는 밥 알갱이를 보며 나는 몇 번이나 눈물 흘렸다/ 죽어도 잊지 않으리(후략)
시 ‘오리(五里)’로 등단
고등학교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되지 않았던 가난, 일찍 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을 우대식은 문학으로 채웠다. 고등학교 때 ‘논어(論語)’ 해설서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삼중당 문고를 끼고 살며 읽고 또 읽었다. 상록수를 읽고 감동해서 박동혁과 최영신의 삶을 꿈꾸기도 했다.
재수를 해서 숭실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다.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을 선택했다. 대학시절에는 교수와 친구들에게 주목받았다. 하나는 너무 해박하고 똑똑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함께 술을 마시고 어울리면서도 학점이 항상 상위권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대식은 대입시험이 끝난 뒤 문학 관련 서적을 다양하게 섭렵했다. 국문과에 입학했으니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친구들과의 문학 토론에서 조금은 앞설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학점에 신경 쓴 이유는 장학금과 교사자격증 때문이었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평균 B학점 이상이 필요했고 교사자격증도 성적순에 따라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대학 때 시인 김현승을 기리는 ‘다형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재(文才)를 인정받은 셈이다. 대학 선후배들도 글을 쓰려고 대학에 입학한 사람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신춘문예 응모에서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취업할 때도 예기치 않은 불이익을 받았다. 성적순으로 하면 서울에 있는 중·고등학교로 우선 배정받았을 텐데 조교의 계산 착오로 진위고등학교로 임용되었다. 우대식은 이것도 운명이고 인연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했으면 뭔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교사가 된 뒤 친구의 소개로 진위출신의 처자를 만나 결혼했다. 대학교 은사님 권유로 숭실대학교 대학원, 아주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러는 동안 등단은 먼 이야기가 됐다.
진위면으로 내려와 문학잡지 <현대시학>을 정기구독했다. 박용래 시인을 좋아해서 그의 시를 탐독했다. 그러다가 1999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등단 시(詩) ‘오리(五里)’는 원주에서 신림 방면으로 가던 중 떠오른 시상(詩想)을 표현했다. 우리 삶에서 ‘오리(五里)’는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이며 그리움의 공간이다. 우대식의 ‘오리’에는 고향에 대한 정체성과 어릴 적 상실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오리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박석수기념사업회로 지역사회와 연대
등단 후 시(詩)도 쓰고 산문도 쓰고 열심히 공부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숭실대학교로 대학원을 다닐 때는 무척 힘들었다. 기차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공부한 뒤 다시 돌아오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박사과정은 수원의 아주대학교로 진학했다. 학위를 빨리 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박사 논문으로 「해방기 북한 시문학 연구 : 1945~1950년을 대상으로」를 썼다. 자료를 구하려고 광화문우체국 위층의 ‘북한자료관’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발행된 <해방기 북한 시문학론>(푸른사상)은 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때 확보한 자료로 논문도 여러 편 썼고 진위 만기사 주지 원경스님이 박헌영 전집을 묶을 때 자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연구능력은 인정받았지만 시(詩)와 학술연구를 병행하는 것은 어려웠다. 우대식은 연구보다 시와 평론을 선택했다. 그가 쓴 시와 평론도 문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00년대 중반 <현대시학>의 요청으로 안성의 ‘임홍재’ 시인에 대해 쓰면서 ‘비극에 몸을 데인 시인들’ 이라는 요절 시인 시리즈를 연재하게 되었다. 김민부, 이경록, 박석수 등 8명의 시인의 삶을 조사하고 문학사적 평가를 했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족들을 인터뷰해서 글을 썼다. 여기에 기형도 시인을 더하여 2006년 <죽은 시인들의 사회>라는 산문집과 <요절 시선>을 펴냈으며 그 뒤로도 증보해서 <시에 죽고, 시에 살다>, <비극에 몸을 데인 시인들> 등을 냈다. 시작(詩作)도 열심히 했다. 몇 년마다 꾸준히 냈던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국경>, <베두인의 물방울>은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우대식에게 ‘평택’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평택은 살아온 곳, 앞으로 살아갈 곳이며 아내와 아이들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유목민 같은 생애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평택을 소재로 시(詩)를 쓴 적은 거의 없지만 책을 낼 때면 글을 썼던 장소를 명시한다. 지난해 출간했던 <시를 만나다>라는 문학평론집에도 ‘진위천변’이라는 장소가 명시되었다.
박석수는 2005년 <현대시학>에 요절 시인을 연재하면서 만났다. 첫 산문집에도 수록했으며 나중에는 <박석수 시(詩) 전집>도 냈다. 송탄지역에서 문화운동을 이끌던 고 이성재, 이상권 등이 주선하고 홍일표 시인이 참석해서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기념사업회와 시비(詩碑) 건립 이야기가 나왔다. 이렇게 해서 2017년 박석수기념사업회가 발족됐다. 초대 회장은 고 이성재가 맡았고 우대식이 2대 회장이 되었다. 우대식은 회장 취임 후 <박석수 전집 발간>을 추진했다. 2023년에는 평택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염원하던 시비(詩碑)도 건립했다. 매년 가을에는 ‘박석수문학예술제’도 개최한다. 전집 발간은 올해 박석수 문학 관련 해설집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우대식의 정체성은 ‘시인(詩人)’이다. 여기에 문학평론가, 교사, 대학교수, 농부라는 직업이 덧입혀졌다. 우대식은 자신의 시(詩) 세계는 ‘나와 나의 시(詩) 사이의 긴장 관계’라고 말한다.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신과 인간의 마음에 관심이 많았다. 거기에서 보고 느낀 것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시(詩)가 어렵다. 내가 보고 믿는 것이 허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이를 먹다 보니 남의 눈치를 보거나 타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평택은 문학적으로 척박한 도시다. 도시의 규모에 걸맞는 문학적 성취가 적다. 우대식은 문학인들의 노력과 함께 평택시문화재단의 역할을 강조한다. 문화의 다양성뿐 아니라 도시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도 문학발전은 필요하다.
2024년부터 매월 넷째 주에 ‘김해규의 문화살롱’을 싣습니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이 만난 다양한 문화예술인 인터뷰를 통해 평택 문화를 향한 독자들의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