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일제 강제동원 피해 접수한 유돈영 옹

“가슴에 맺힌 ‘한’ 나라가 풀어달라”

2005-02-23     이철형

군인으로 강제 징병…일본에서 온갖 고생

▲ 징병시절 사진을 보여주는 유돈영 옹
평일이면 오전부터 증권사 객장을 찾는 유돈영(81ㆍ팽성읍 남산리) 할아버지는 지금도 일제때 강제 징병으로 끌려가 고생한 생각을 할 때면 가슴이 턱 막히고 팔다리가 떨려온다.
지나간 세월을 떠올리면 일제의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21일 시청에 일제 강제동원 피해신고 접수를 마친 유 할아버지의 한은 해방을 1년 남짓 앞둔 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관의 나이, 당시 평택군 씨름대회에 팽성면 선수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고 기백이 넘쳤던 할아버지.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을 정도로 집안도 부유해 흰 쌀밥만 먹으며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징병으로 끌려가면서 평생의 고통이 시작됐다.

44년 9월 경기도 갑종학교 1기로 졸업한 뒤 평택역에서 기차를 타고 함경북도 나남시로 끌려갔다 다시 부산에서 배(관부연락선)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 한 야포대에 배속돼 복무하게 됐다.

힘든 훈련과 노역이 계속됐지만 식사로 나온 것은 수수와 콩 등으로 만든 죽.
흰쌀밥만 먹던 할아버지는 극심한 위장병으로 시달려 건장한 체구가 비쩍 말라갔으나, 일본인 상관은 꾀병이라며 오히려 구타를 일삼았다.

그렇게 1년간을 꼬박 고통 속에 있다 해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계속된 위장병으로 고생하다 89년 결국 위의 3분의 2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해야만 했다.
47년 당시 철도경찰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영등포경찰서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결국 좋지 않은 건강과 부친의 부름으로 5년만에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유 할아버지는 “한때는 (평택)군에서 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나라가 없으니...국민들이 그 고생을 했지”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유 할아버지는 “죽기전에 일제의 만행이 제대로 밝혀지고 일본의 사과를 정부가 앞장서서 받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한일회담을 하면서 국민들이 고생한 보상금으로 국가를 복구해 이만큼 살만해 졌으니, 이제는 정부가 고생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