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화단에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화가 이세준
김해규의 문화살롱 ⑨
지난 8월 22일 평택북부문예회관 전시실에서는 ‘가능세계의 그림들’이라는 조금은 철학적이고 낯선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상당한 규모의 전시장 안은 70여 점의 그림들로 꽉 차 있었다. 그림의 크기도 매우 컸으며 하나의 주제를 여러 장의 그림으로 옴니버스한 작품들이 많았다. 작품들도 철학적이고 기법이 현대적이어서 도슨트의 해설을 듣고서야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미술이 그렇듯 단박에 이해되는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묘한 매력이 있었다. 가까운 지인은 무려 세 번이나 관람했다고 고백했다. 전시회를 개최한 화가는 이세준(남, 1984)이다. 평택에서 나고 자라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세계무대를 꿈꾸는 전도유망한 화가다.
송탄에서 나서 평택에서 성장해
재수 끝에 홍대 미대 입학
거의 독학으로 홍대 미대 입학
이세준은 평택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 고향은 구장터지만 성장기 대부분을 송탄 육교 아래와 이충동에서 보냈다. 어린시절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손재주로 한 번만 보고도 썩썩 그려냈다.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처럼 피아노학원과 태권도학원에 보냈다. 하지만 피아노나 태권도학원에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태권도학원에서는 팔이 부러졌는가 하면 피아노 선생님은 ‘이렇게 음악에 둔한 아이는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르기까지 했다. 사교육에서 해방되면서 자유로운 시간과 상상력을 선물로 받았다. 선물로 받은 자유로운 시간에 이세준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심심함을 달래주는 놀이였고 학교와 친구들 사이에서 자존감을 높여주는 매개였다. 물론 만화영화 캐릭터나 인물을 그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림에서 얻는 희열은 대단했다.
재능은 출중했지만 처음부터 화가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는 수학, 과학 같은 이과 과목을 잘해서 막연히 이공계 대학에 진학하여 연구원이나 회사원으로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초에 미대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했다. 가슴 속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이 솟구쳤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들은 깜짝 놀랐다. 성적도 우수한데 굳이 전망도 불투명한 화가가 되려냐며 말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부모님이 완강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세준보다 공부를 잘했던 형님이 상황에 밀려 지방대에 진학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세준은 미술대학 희망자라면 당연했던 미술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독학으로 입시를 준비하다 보니 입시정보나 기초에서 많이 부족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응시했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재수할 형편도 못돼서 지방국립대였던 한경대학 디자인계열에 입학했다. 한경대학에 다니면서 오히려 홍대 미대로 진학해야겠다는 열망이 커졌다. 그해 9월 상경하여 고작 몇 달 동안 서울의 미술학원에서 입시를 준비했다. 그리고 바라던 홍대 미대에 합격했다.
대학 졸업 후 뉴욕아트쇼(NewYork
Art Show) 최우수 작가 등 수차례
수상하며 중견 작가로 성장
왕성한 활동으로 중견화가로 성장
홍대 미대에 입학했더니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많았다.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실력파들이 모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대학생 때 이세준은 ‘서정리’로 불렸다. 학생뿐 아니라 교수님까지도 ‘서정리’라고 하였다. ‘서정리’라는 호칭에는 ‘서울’과 비교되는 ‘촌놈’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호칭이 부끄럽고 싫었지만 어느 때부터 ‘촌스러움을 외면하기보다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작품의 자양분으로 삼자’고 생각을 바꿨다. 기초부터 꼼꼼하게 배우지 못해 쉬운 기법에서는 부족했지만 창의적 아이디어에서는 남달랐다. 자본주의적으로 잘 팔리는 작품, 틀에 박힌 그림이 아니라 개성과 창의성에 기반한 그림으로 차별성을 갖자는 생각도 이때 가졌다.
이세준은 20대 시절을 수련과 단련의 기간이었다고 말한다.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채 그림이 좋아서 그리는 것에만 몰두했다. 사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어떤 취미활동보다 그림 그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2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몇 년 전에는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졸업을 앞두고 있다.
올해 《가능세계의 그림들》 이라는
주제로 고향에서 첫 전시회 가져
20대 말부터 본격적인 전시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2012년으로 기억된다.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신진작가 지원프로그램인 SeMA에 최연소로 선정되어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센터, 송은문화재단 등 다양한 기관과 손을 잡고 개인전과 기획전을 가졌다. 뉴욕아트쇼2012 (NewYork Art Show 2012)에 참가하여 뉴욕의 신한갤러리에서도 전시회를 가졌다. 왕성한 활동으로 ‘뉴욕아트쇼(New York Art Show) 최우수작가상(2013)’, 제1회 KSD 미술상 대상(2019), 제23회 송은미술대상 선정 작가, Kiaf 세미파이널리스트 10(2024) 등 수차례 수상도 했다. 올해 평택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개최한 《가능세계의 그림들》이라는 전시회는 14번째 개인전이다.
평택정서는 그림의 자양분
20, 30대에는 ‘평택’에 불만이 많았다. ‘내가 힘들고 고생할 때 평택이 해준 게 뭐 있는데’라는 불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40대 전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그림에 담긴 정서가 평택이라는 공간, 그 속에서의 경험에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평택(송탄)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혼종적이고 다의적인 세상이었다. 미군기지의 소음과 포성이 있고, 모순투성이의 기지촌과 시골의 목가적 풍경이 공존하며, 기지촌 상인들과 여성, 순박한 시골 농부들이 살을 비비고 사는 곳이었다. 상호 이질적이고 모순된 공간에 대한 기억은 이세준에게 독특한 세계관이 되었으며 이것이 그림에도 표현되었다.
미군부대와 농촌, 기지촌과 목가적
풍경 등 고향 송탄의 기억과 체험이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철학적,
복합적인 그의 작품세계 기반
지난 8월 전시회의 표제인 ‘가능세계의 그림들’도 비슷한 관점이다. 이 표제는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가능세계의 철학’에서 빌려왔다. 여기에서 ‘가능세계’는 사물들이 현실에서 존재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전제된 설정하에 다른 방식으로 유추된 세계를 의미한다. 화가는 자신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과 경험하지 않아서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현실에서 존재했던 것들을 평면적 화폭에 담으려고 시도했다. 어릴 적 경험한 아름다운 기억과 자본주의적 욕망이 빗어낸 도시화와 산업화된 현실의 모순, 죽임과 죽음으로 치닫는 기후위기 문제로 변해버린 세상, 어릴 적에는 계곡과 하천에서 자유롭게 노닐던 물고기들이 수족관에 갇혀 자유를 구속당하고 죽임당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철학과 방향성을 갖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은유적으로 비판한다. 잠시 ‘작가 노트’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는 스무 살 가을 무렵 고향 평택을 떠나와서 서울에 자리를 잡고 다시 또 스무 해를 살았다. 나의 삶에는 무수히 많은 경험이 기억되어 쌓였지만 어느 때인가부터 내가 겪지 않았던 것을 그리워하는 습관이 생겼다.(중략) 내게 있었던 기억과 그것을 증거하던 모든 것은 전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변해 버린 것, 떠나가 버린 것은 어디 그뿐 일까.(중략) 나는 내게서 사라진 기억이, 그리고 그것이 있었다는 조그만 흔적조차 남지 않은 사실이 허공 속을 둥둥 떠 다니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 주인을 잃은 기억들은 계속 공기 중에 떠다니다 누군가에게 닿아 그가 겪지 않은 일들을 그리워하게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이세준의 작품은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다의적 세상을 화폭에 담다 보니 현학적이고 크기가 크며 여러 개를 옴니버스한 것이 많다. 서사가 있지만 기승전결로 정리되지도 않는다. 여러 가지로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와는 맞지 않는 작품이다.
평택도 광주나 부산, 고양, 인천처럼
젊은 작가들 전시공간과 레지던스
등 지원하며 인큐베이팅 해주길 기대
평택에도 수준 높은 미술관과 창작 레지던스 공간 필요
이세준은 잘 팔리는 작품보다 좋은 작품을 지향한다. 실제로 열 번이 넘는 개인전과 수십 차례의 기획전을 했지만 작품의 상업적 성공과 판매보다는 예술적 성취에 초점이 맞추어진 행보였다. 20, 30대에는 앞뒤를 보지 않고 열정적으로 작품에만 몰두했지만 이제는 자본주의적 그림 시장과 타협하지 않고 작품세계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공간은 대학이다. 그가 생각하는 대학은 기금을 지원받거나 공모전에 응시하지 않고도 최소한의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며,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활동이 가능한 공간이고, 미래 세대를 키울 수 있는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2024년 2학기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출강한다. 2017년에 이어 올해도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그간의 작품활동과 비평문을 모은 책을 제작 중에 있다.
평택지역 예술 발전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이세준은 개인적으로 평택에서도 지속적인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그림의 태생지인 평택시민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평택시와 평택문화재단이 청년작가 육성을 위해 좀 더 노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대전과 광주는 출신 청년작가들에게 해외 레지던시 참여기회를 주거나 시립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어주며 후원한다. 광주광역시에서는 광주비엔날레를 개최하고, 부산, 인천, 고양시에서는 전시공간과 창작 레지던스 공간을 만들어 젊은 예술가를 인큐베이팅하는데 평택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미술관 건립을 건의했다. 수준 높은 미술관과 우수한 큐레이터를 갖는 것은 미술의 양적, 질적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이 도시의 품격과 질적 성장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본지는 1월 24일부터 매월 넷째 주에 ‘김해규의 문화살롱’을 싣습니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이 다양한 문화예술인을 인터뷰해 독자들의 평택 문화를 향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