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지역(地域)에서 세계적 극단을 꿈꾸는 ‘극단 민들레’ 송인현 대표
김해규의 문화살롱 ⑧
이번 주 ‘김해규의 문화살롱’은 ‘극단 민들레’ 송인현 대표의 인터뷰를 싣습니다. 화성시 우정읍에서 민들레연극마을을 운영하는 송인현 대표를 통해 지역(地域)에서의 문화 활동의 가치와 의미,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영화배우를 꿈꾸었지만
서울예대 연극과 입학 후
본격적인 연기 인생 살아
대표님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 고향은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인데 ‘뱅고지’라고 부르죠. 어릴 적 할아버님은 방앗간과 염전을 운영했어요. 집안이 부유해서 고생을 모르며 성장했어요. 지금도 ‘고향’하면 ‘낙원’ 같은 이미지, 따뜻한 사랑의 이미지가 있어요. 제가 고향에 내려와 민들레연극마을을 운영하는 것도 ‘어린이들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예요. 저는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가 고향(고향의 정서)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연극하던 시절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고향’이 주는 힘 때문이었어요.
연극은 언제 시작했어요?
어릴 적에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할머니와 함께 서울로 유학을 갔는데 서울 아이들과 경쟁에서 존재가치를 잃었죠. 학생 수도 89명이나 되니 선생님의 보살핌도 받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마음의 병을 얻었습니다. 학교만 가려면 배가 아팠어요. 할머니는 배가 아프다고 하면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어요.
다시 전학을 가서 이번엔 막내 고모와 함께 있었는데 고모를 따라 영화관에 많이 갔습니다. ‘돌아온 왼손잡이’ ‘상하이 왼손잡이’ 같은 영화를 봤는데 영화들 덕분에 주눅들었던 마음이 치유되고 그래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죠. 중학교 때는 담임선생님께서 영화현장을 경험하게 해줬어요. 그 뒤로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촬영감독, 연극배우, 조명 디자이너, 극작가로 꿈이 바뀌기도 했지만 영화 관련 일을 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없었어요.
아버지는 연극영화과 진학을 반대했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싫어하셨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극영화과에 응시했지만 탈락하고 말았어요. 새어머니 권유로 신학대학에 진학했는데 흥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영화판을 돌아다니며 조감독 일을 하거나 영화진흥공사 도서관에 다니며 영화를 봤죠. 그러다가 다음 해에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입학했어요. 대학시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습니다. 교수님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맘껏 재능을 발휘했어요. 서울예술대학에서 저는 학생보다 대학 식구에 가까웠죠. 군대를 전역한 뒤에는 강의도 했어요. ‘동랑청소년극단’의 살림을 맡아서 운영도 하고요. 그러다가 학생들이 연습실을 마련해달라고 데모할 때 이를 제지하라는 학교 측에 “학생들 주장이 맞잖아요”라고 했다가 잘렸습니다.
이탈리아 한 레지던스 오픈
축하공연에 7개국 연기인들과
함께 참여하며 ‘문화’로 소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깨달음 얻어
이력에는 봉산탈춤을 추고 계시더라고요. 언제부터 배운 건가요?
올해 봉산탈춤 ‘전승교육사’가 되었습니다. 시작은 강령탈춤을 먼저 했죠. 대학 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어요. 배우 박상원이 친구인데 ‘강령탈춤전수자’가 되면 용돈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우리 대학에 조운용 선생님이 계셔서 봉산탈춤을 추게 되었죠. 그래서 제가 배운 탈춤은 운동권 탈춤과는 다른 경로랍니다.
1980년에는 ‘봄이 오면 산에 들에’라는 작품으로 연극 생활을 시작했어요. 소품 담당이었는데 정말 정성을 다해서 만들었죠. 위에서 말씀드렸다 시피 서울예술대학 총장님 추천으로 몇 년 동안 ‘동랑청소년극단’ 살림도 맡았었죠. 극단 ‘목화’, 극단 ‘바탕골’ 창단에도 관여했어요. 연기와 무대 세트, 소품을 직접 만들며 동분서주했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던 시절이었어요.
연극판에서도 어린이극은 인기가 없는데 이쪽에 관심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1995년에 경기도립극단 ‘연기지도 담당관’으로 부임했어요. 대우는 부군수급으로 무척 좋았어요. 그런데 직장 생활이 맞지 않아서 6개월 만에 그만두었어요. 도립극단에 들어가기 전 KBS 특집극에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현장에서 감독님 말씀을 잘 알아들어선지 나중에 조연급이 됐더라고요. 그 인연으로 영화에도 캐스팅되었는데, 연극 일정과 겹쳐지면 영화 쪽에선 무조건 촬영 스케줄을 들이대는 거예요. 마음의 상처와 실망감으로 그 뒤로는 영화판과 담을 쌓았어요. 이렇게 방황할 때 서울예술대학 유덕형 총장님 추천으로 이탈리아를 가게 됐어요. 당시 미국에서는 오프브로드웨이의 ‘라마마 극단’이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됐죠. 그러자 세계에서 이 극단 살리기 운동이 일어났죠. 미국 정부에서는 라마마를 이끄는 ‘앨런 스튜어트’에게 특별상과 상금을 주었고요.
엘런은 이 돈으로 이탈리아의 스폴레토라는 시골에 레지던스 공간을 만들었어요. 이곳을 오픈하는 축하 공연 ‘에라누스’에 참가했어요. 7개국 배우들이 새벽까지 연습했어요. 이 같은 경험을 하면서 나만의 독창적인 작업을 하기 위한 ‘문화유전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언어와 정서는 달라도 ‘문화’로 소통할 수 있다는 깨달음과 자신감이죠.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방향성을 놓고 고민하던 중에 철학자 윤구병 선생님이 관여한 ‘어린이 마을’이라는 책을 만났어요. 민화를 파스텔이나 수채화로 그렸더군요. 어떻게 하면 전통을 현대적으로 살려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차에 어떤 방향성을 찾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어린이극을 시작했습니다. 극본, 연기, 소품 등 1인 다역을 했죠. 어린이 연극을 하면서 ‘논농사’가 우리 문화의 뿌리라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경기도 양평에 있는 논을 임대하여 어린이들과 모내기와 논매기를 하면서 새로운 방안을 실험했어요. 하지만 양평은 거리가 멀고 시간도 없어 다른 방안을 모색하다가 고향의 종중 논을 빌렸어요. 매달 4째주 토요일만 놀던 때였어요. 장애 어린이와 비장애 어린이들이 함께 농촌체험을 하고 연극놀이를 하는데, 어느 날 농림부에서 ‘녹색농촌체험마을’을 해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민들레연극마을’을 시작하게 된 거죠.
고향 화성시 우정읍에 ‘민들레
연극마을’과 극단 만들고
어린이 연극 본격 시작
민들레 극단은 언제 만들었어요?
극단을 만든 것은 1996년이예요. 이탈리아를 다녀와서 고민하던 중에 만들었죠. 우리의 신화와 전통에 대한 고민, 내가 나인 것에 대한 고민, 우리 아이들이 우리로 자라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었어요. 서울 중심의 활동에서 오는 한계도 고민됐죠. 그래서 2007년 결단을 내려 아예 화성시 우정면으로 내려왔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훌륭한 연극이 이뤄진다고 생각하지만 해외의 중요한 극단들은 시골에 근거를 두고 있답니다. 덴마크의 ‘오딘’이라는 극단은 ‘홀스부르’라는 작은 도시에 있고, 프랑스의 ‘풋츠반’은 ‘라 쇼세’라는 시골에 있어요. 독창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줄서기 경쟁이 아닌 나만의 작업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극단 민들레와 대표님은 지역과 어떻게 연대하고 상생하며 가치를 구현하나요?
예술작품은 가치, 독창성, 완성도 세 가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이든 연극이든 예술작품은 공공재라는 인식이 필요해요. 공공재로 시대적 가치를 담지 못하면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어요. 배운 대로,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예술가의 장점과 가치관’을 구현하는 것과 함께 작품의 완성도를 추구해야죠.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구현되었을 때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거라고 봐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가치와 독창성보다 완성도만 중요시하죠. 잘했다, 못했다만 있지 왜, 어떻게,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지는 큰 관심이 없는 거죠. 우리 극단이 ‘오디푸스 2021’이라는 작품을 올렸어요. 저는 이 작품을 통해 ‘안다는 것은 행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이와 함께 독창성은 어디에서 올까에도 의문을 가졌어요. 명작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삶의 이야기라는 인식, 독창성은 예술가의 창의적 해석이 곁들여질 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이 같은 것들을 실현하려면 지역이 유리해요. 지역의 문화유산, 삶의 경험, 정서가 위의 세 가지 요소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생각해요. 제가 고향마을에 ‘화성민들레연극마을’을 만들고 ‘극단 민들레’와 ‘민들레 놀이연구소’를 운영하는 이유죠.
지역 예술이 세계적으로 인정
받으려면 수 많은 지역
이야기들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독창적 해석과 높은 완성도 필요
평택에서 지역적 정체성을 갖고 연극문화를 발전시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저는 지난번 평택시문화재단이 주최한 학술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지역예술가들이 뭔가 모르게 위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역은 중앙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중앙에는 없는 장점이 많습니다. 지역예술가들에게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요. 작품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 지역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이것을 예술가의 입장에서 독창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 같아요.
제 고향마을에서 ‘지네산’이 사라졌습니다. 산 주인이 자동차 회사에 팔아버린 것이죠. 자동차 회사는 이 산에서 나온 흙으로 작은 만(灣)을 메꿔서 두 곳에 자동차 야적장을 만들었습니다. 지네산은 ‘임진왜란 때 지네가 독안개를 뿜어 마을을 지켰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산이며 오랫동안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냈던 신성한 산이었어요. 이 이야기를 들은 인도 친구가 ‘자본에 의해 신화가 사라졌구만’이라고 말하더군요. 무릎을 쳤지요. 그렇게 해서 만든 연극이 ‘산이 운다’와 ‘누가 임자?’라는 작품입니다. 저는 예술가들이 지역적 소재를 사실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큐죠. 평택지역의 수많은 이야기가 예술로 승화하려면 이야기가 갖는 가치와 함께 독창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높은 완성도를 갖는 것도 중요하겠죠. 예술가의 독창적 해석과 높은 완성도만이 ‘지역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연극을 비롯해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평택시문화재단을 비롯해서 공공기관의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예술은 전문적 영역입니다. 일정한 틀을 만들어 놓고 예술가들에게 그 안에서 놀라고 하는 것은 예술발전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제 지역이 가치와 독창성, 완성도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 중앙과 세계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의 생각이 달라져야 하고 관계기관의 자세와 지원도 달라져야 합니다.
본지는 1월 24일부터 매월 넷째 주에 ‘김해규의 문화살롱’을 싣습니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이 다양한 문화예술인을 인터뷰해 독자들의 평택 문화를 향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