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영혼을 위로하는 춤꾼 정기옥
김해규의 문화살롱 ⑦
초등학교 시절 춤에 매료되어
충남 보령의 오천항은 보기 드문 미항이다. 조선시대 충청수영이 있었던 영보루에 오르면 나폴리에서나 봄직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오천항은 2019년 큰 인기를 끌었던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고을 정기옥(1961년생)은 오천항에서 태어났다. ‘동백꽃 필 무렵’의 공효진과 강하늘이 노닐던 바닷가와 영보정이 그의 놀이터였다. 부모님은 자수성가했다. 보리쌀 한 되를 갖고 분가하여 농사를 일구고 어업도 하고 김 양식도 하고 약초 재배와 목축도 하면서 집안을 일으켰다. 정기옥은 8남매 중 막내였다.
평택과는 1995년부터 인연 맺고
‘평택호 물줄기 따라밟기’ 행사와
‘물축제’, 문화예술축제 등 진행
부모님은 정기옥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 갈현동으로 이사했다. 부모님은 서울로 이사하여 오천항 인근에서 쌀·김·사과·잡곡을 사들여 서울에다 팔았다. 정기옥도 부모님을 따라 갈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농악부에 가입했다. 전라도에서 올라온 선생님은 농악뿐 아니라 춤과 노래까지 가르쳤다. 그 시기에 친구와 무용학원에 다니며 한국춤을 배웠다. 춤은 낯설었지만 즐겁고 행복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맸다. 부모님도 의사도 포기했지만 놀랍게도 생명을 되찾았다. 연탄가스 후유증을 치료하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다시 상경한 뒤로는 대천의 큰오빠 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에서 다시 춤을 만나
대천의 중·고등학교 근처에는 무용학원이 없었다. 고작 초등학교 때 1년 배운 실력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무용을 배웠다는 자부심은 컸다. 청소년기 교회를 다닐 때도 찬양과 율동을 잘해서 목사님께 칭찬받았다. 학교에서는 무용반 활동을 했다. 하지만 무용을 지도할 선생님이 없어 지역교육청 대회가 열릴 때만 학생들끼리 연습해서 출전했다. 친구들과 성심원이라는 농아학교에서 무용도 가르쳤다. 농인들은 감성이 풍부해서 춤을 무척 좋아했다.
정기옥의 예인(藝人) 기질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릴 적 시골 마을에서 접했던 다양한 문화 체험도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어린 시절 오천면 영보리 입구에는 작은 점방이 있었다. 점방 주인은 기생 출신의 할머니였다. 기생 할머니는 종종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장구치고 노래하며 놀았다. 점방의 주요 고객 중에는 정기옥의 어머니도 있었다. 어머니는 성격도 호탕했지만 흥이 남달랐다. 무속신앙도 열심히 섬겼다. 집에서는 추수가 끝나면 무당을 불러 성대하게 굿을 했다. 굿하면서 마련한 음식은 이웃들과 나눴다. 장날 어머니가 돌아올 무렵에는 점방에 갔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기 전 점방에 들러 놀았다. 정기옥도 종종 어른들과 어울려 춤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 칭찬을 많이 받았다. 어른들의 칭찬을 받다 보니 정기옥의 뇌리에는 ‘나는 춤을 잘 춘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대학교 무용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프로야구가 개막할 때는 아르바이트로 치어리더 활동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지도교수 추천으로 용인시 용동중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했다. 중학교에서 몇 년 동안 체육과 무용을 가르쳤다. 무용반도 운영했다. 용동중 무용반은 창작아이디어가 우수해서 주요 대회를 석권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사이판 강제
동원자 위령제 매년 진행해 오고
2018년에는 어영애와 함께 사할린
방문해 추념식도 진행
용인대학에 편입하며 무용가로 본격 활동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용인대 무용과에 편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경기대에서 석사, 용인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오랫동안 용인대에서 강의도 했다. 대학에서 평생의 스승 이병옥 선생을 만났다. 송파산대놀이 예능 보유자 이병옥 선생은 정기옥을 무척 아끼고 신뢰했다. 현장조사를 떠날 때마다 동행했고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할 기회를 줬다. 수많은 대회에서 다양한 춤꾼들을 만나면서 견문이 넓어졌다. 우리 문화의 참된 가치와 소중함도 깨달았다. 서구문화에 밀려 사장되는 우리 문화의 현실도 경험했다.
대학 시절 한국무용으로 방향 전환했다. 국가무형유산 태평무를 배우며 안성의 유청자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안성에는 유청자 외에도 이석동 같은 춤의 명인들이 거주했다. 유청자 선생에게 춤을 배우며 경기도의 다양한 춤을 접했다. 가까운 용인에 김량장 할아버지로 통했던 김인호같은 춤꾼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유청자 선생의 안성향당무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향토적 색채가 짙다. 근·현대 시기 안성지역 향당(鄕黨)이나 교방(敎坊)에서 전승되던 춤, 마을굿이나 사당패놀이에서 추었던 춤에 주변 지역 춤이 습합되면서 형성된 것이 안성향당무다. 정기옥은 유청자 선생으로부터 봉황금란무, 장검무, 태극진세무, 진혼무를 배웠고 이석동 선생에게는 화랑무를 배웠다.
1990년 용인대에 편입할 때 무용학원을 운영하며 ‘고을무용단’을 창단했다. 고을무용단과 함께 ‘고 앤드 스톱’, ‘허와 실’ 같은 작품을 안무하고 대학원 공부와 후진 양성을 병행했다. 1999년 화성시의 ‘제암리 3.1운동 위령제’를 시작으로 1999년 화성 씨랜드참사 위령제, 용인시 좌찬령 3.1절 행사에 참여하며 환경운동·여성운동에도 관여했다. 평택과는 1995년 말 인연을 맺었다. 평택·수원·용인·오산·화성의 시민단체들과 ‘평택호 물줄기 따라밟기’를 전개할 때 ‘물(水)’을 주제로 춤을 추면서 평택호 변의 현덕면 권관리에 집을 마련했다. 권관리에는 공연과 퍼포먼스를 함께할 수 있는 평택호예술관도 있었다. 2004년 결혼하고 난 뒤로는 아예 권관리에 정착했다. 잠시 대안학교에서 교사를 할 때도 권관리의 집은 처분하지 않았다.
평택에서 후진양성과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할 것
2000년대 초반 ‘평택호물줄기 따라밟기’ 행사의 하나로 ‘물축제’를 시작했다. 2001년에는 진위천의 발원지 용인 무네미고개 아래 금학천에서 ‘하늘로 가는 물고기’라는 이름으로 공연했다. 2002년에는 수원의 방화수류정에서 ‘물꽃’이라는 이름으로, 이듬해는 평택호에서 춤을 췄다. 그러다가 개인 사정으로 몇 년 동안 활동을 중단했을 때 현덕면 신왕리에 거주하는 행위예술가 김석환 선생이 물축제를 다시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기옥은 김석환이 주도하는 행사에서 풍어제와 뱃고사만 담당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물축제는 현덕면 주민자치회를 거쳐 현재 평택시문화재단이 개최하고 있다.
평택에 정착하면서 여러 행사에서 춤을 췄다. 무용대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평택환경운동연합과 행담도에서 아산만 환경보전을 위한 공연도 했고, 평택호예술관에서 2013년 ‘경기 춤 축제’도 개최했다. 2013년에는 평택호예술관에서 ‘제1회 한여름의 축제-틈·터·틀의 의미’라는 문화예술축제를 개최했다. 서각, 자수, 서화, 민화, 도예, 춤의 명인들이 참가하여 분야별로 부스를 열고 공연과 전시를 병행하는 전람회였다.
평택에서 전통문화 매개해
몸으로 역사와 문화 체득하는
대안적 문화체험학교 만드는 것이 꿈
1999년 괌의 한국사찰 낙가사에서 서예가 고천 김동수와 무용가 고을 정기옥을 초청했다. 이곳에서 징병, 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이국땅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가슴이 아파 다음 해에는 강제 동원자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는 사이판을 방문했다. 사이판섬 곳곳을 돌아보며 아직도 유해발굴 및 송환은 고사하고 위령제도 지내지 못하는 아픈 영혼들을 마주했다. 기가 막혀 가슴을 쥐어짰다. 2001년 사이판 한인회를 방문하여 위령제라도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 자비를 들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설과 추석에 방문하여 5, 6회쯤 위령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2015년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 김홍균 회장을 만났다. 2016년부터는 김홍균 회장의 지원을 받아 각 분야의 명인들을 초청하여 사이판에서 성대한 추념식을 개최했다. 2018년에는 사이판 한인회가 운영하는 한글학교에서 ‘찾아가는 틈·터·틀 문화예술학교’도 열었다. 2018년에는 평택지역 국악인 어영애와 사할린을 방문하여 추념식을 거행했다. 매년 개최되던 사이판 추념식은 코로나로 잠시 중단됐다가 2023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올해도 시인·서예가·사진가·무용가·역사가와 함께 사이판과 티니안에서 두 차례 추념식을 거행했다.
정기옥은 전통문화를 매개로 선조들의 삶과 문화적 가치를 일깨우게 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 문화체험학교를 열어서 아이들이 몸으로 역사와 문화를 체득하게 하고도 싶다. 평택지역의 폐교나 유휴공간을 활용하여 아이들과 시민들이 맘껏 뛰놀며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체육·문화·예술 대안학교 설립도 꿈꾼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자치단체의 도움을 기대한다.
본지는 1월 24일부터 매월 넷째 주에 ‘김해규의 문화살롱’을 싣습니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이 다양한 문화예술인을 인터뷰해 독자들의 평택 문화를 향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