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로 만나는 평택섶길 풍경 19
됫박산, 그리고 합정4리와 합정3리 통미
됫박산
신평동사무소 뒤편께 합정리 들 한복판엔 바가지를 엎어놓은둣 작은 동산이 있었다. 그 중턱쯤 회화나무였을까 아이들이 기어오르고 걸터앉았던 구부정한 고목과 그 주변 나름 또 오래된 고목들이 몇 그루 더 있었던 됫박산, 그 작은 섬동산 둘레에는 당집 하나와 전기도 없는 집 너댓 채가 둘러있었다.
오십 년은 넘었을 장면이다. 됫박산은 그 후 택지개발로 허망하게 뭉개져 없어졌고 그 모습을 온전하게 담아놓은 사진 하나 남겨진 게 없다.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나무 근처에서 찍은 몇 장의 사진과 구술 고증을 참고한 수채화 한 점이 만들어졌다. 통미 도서관 주선으로 동양화가 김은숙이 그린 그림이다. 그 장면에 사진 속 여고생인 듯한 아이들 모습을 덧붙여 펜화로 그려보았다.
합정4리와 합정3리 통미
멀리 보이는 산은 덕동산이다. 옛날 그 민둥산 꼭대기엔 충혼탑이 세워지고 그 아래로 내려오는 어인남리의 완만한 구릉엔 듬성듬성 집들 몇 채가 있을 뿐이었다. 안성 가는 길 그 아래쪽은 합정리다.
국도 바로 아래 합정4리와 또 그 아래 오밀조밀한 집들 사이로 좁은 길이 미로처럼 있어 집마다 연탄재 밟아놓은 손바닥만 한 텃밭엔 마늘이 심긴 그런 모습의 합정3리 통미는 오래된 동네였다. 마을 앞 넓은 들 조개터와 소사뜰에 의지하여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곳이다. 명절 때면 그들 토박이들은 동네를 돌며 거북놀이를 했고 해마다 동네 공동 식수 우물을 퍼내고 청소했다. 신안아파트가 지어지기 전 그 끝자리엔 농업용수 펌프장이 있었다. 통미 앞 들은 문전옥답이었다.
통미 사람들
합정4리 국도변 넓은 터전에 정미소를 가지고 있던 땅딸한 키의 정목수는 젊은 날 건축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정미소 운영과 큰 농토에 집도 몇 채 되었던 그는 출가한 딸에게도 집세를 받아내는 돈 개념이 철저한 사람이다. 젊은 시절 함께 사업하던 친구가 죽자 그의 부인을 돌보던 중 그들 사이엔 아이가 생겼다. 정목수 부인은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정목수는 60이 채 안된 어느 날 골치를 한번 더듬곤 쓰러졌다. 따르는 이 별로 없는 그의 상여는 쓸쓸했다.
성동초교와 성동사거리 길 건너편엔 철도청 관사가 일렬로 십여채 있었다. 합정4리인 이곳은 ‘관사동네’로도 불렸다. 관사 동쪽 끝자리는 조낙곤의 집이다. 그는 철도국에 다니며 살던 관사를 불하받았다. 황해도 피난민인 그는 술이 거나해지면 ‘울고 넘는 박달재’를 즐겨 불렀다. 그의 애주 인자(因子)는 아들에게 내림되었다. 친구인 그는 아버지 술 심부름마다 주전자 꼭지로 한 모금씩 맛보며 술맛에 일찍 눈을 떴단다. 어린 시절의 술 사건들은 아슬아슬하다. 중학시절 한 추운 날 달큰한 가용주 두 보시기를 떠먹고 등교한 적이 있다. ‘술 먹으면 안 춥다’는 말을 동네형에게 들어서다. 공부시간 웬 술냄새가 난다는 주변 녀석들 수군거림에 숨도 안 쉬고 직수그려 있었다. 나중에 어이없다는 눈길로 쳐다보던 속 깊었던 짝 그 녀석..
철도관사 옆 합정4리 양옥에 살았던 1911년생 이민성은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이다. 그는 교사생활을 하던 중 장면정부가 들어서며 독립운동가 이병헌의 추천으로 평택 군수가 된다. 취임 8개월 만에 5·16이 났고 어느 날 군수실엔 군복 차림의 한 사내가 노크 없이 들어온다. 그의 말은 당돌했다. “내가 새로 온 군수요” 한동안 쉬던 이민성은 국회의원 서상린의 지원으로 기호 농조수리 조합장을 9년간 했다. 그는 합정4리 양옥을 팔고 은행지점장 큰아들의 봉양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금동섭은 통미동네의 마당발이다. 성실한 그는 부인과 함께 물려받은 집에 식당을 연다. 삼겹살과 청국장백반으로 유명했던 봉화식당이다. 한동네인 나는 퇴근길 식당 앞 주차장에 차를 댈 적마다 삼겹살과 청국장 냄새에 홀리듯 이끌려 이리저리 술친구들을 모집했던 일이 수도 없다. 그는 나이가 많아져 종업원에게 가게를 이어가게 했지만 그 맛까지 잇진 못했다. 70대 중반인 그는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김양웅은 통미의 이발사다. 그는 군에서 제대한 뒤 이발기술을 배워 통미에 이발소를 개업했다. 그의 모친은 통복시장 안에서 야채행상을 하며 시장 안에 있던 교회에 나가게 된다. 모친의 믿음은 독실해서 슬하 7남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김양웅도 교회를 다니게 됐고 그의 됨됨이를 눈여겨본 교회 목사는 충남 공주의 친구 목사와 서로 중매하여 공주 출신 기독교도인 처녀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81세의 그는 여전히 ‘평안이발관’을 운영하고 있다.
흐르는 세월
어디나 그렇듯 합정4리와 통미의 옛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옛날 토박이들도 이미 세상을 등졌거나 어디론가 떠나고 옛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 뿐이다. 빈자리엔 자손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로 채워진다. 세월의 섭리다. 젊어서 영화배우를 꿈꿨던 통미 토박이 송건영도 십 여년 전 살던 건물을 팔고 떠났다. 신안아파트 골목 모퉁이 이레교회 건물이다. ‘통미도서관’ ‘까페’ ‘공장’ 등 많은 이름이 걸려있는 그곳은 목사 최기용과 박명진 부부가 주인이다. 굴러온 돌인 그들은 신기하게도 옛날 됫박산과 통미의 기록을 모으고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토박이 박힌 돌들이 못한 일이다. 그 앞을 자주 왕래하지만 교회의 느낌은 없다. 아이들이 모여 놀거나 젊은 엄마들의 분주한 모습이 보이는 정도다. 아이들을 위한 사업인 ‘작은 도서관’은 2016년 ‘경기도 최우수 작은도서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발달장애 어린이들의 홀로서기 사업인 ‘까페’는 그 엄마들도 참여한다. 박명진은 그 엄마들을 돕는 엄마임을 자처한다. 의지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엄마일 수 있음은 거룩한 일이다. ‘누구나 함께하는 공감의 장’인 ‘공장’은 작은 축제와 공연 전시로 일상문화가 있는 마을을 꿈꾼다. 그들은 교회가 중심이 아닌 마을의 일원이 되기를 추구한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그들은 통미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간다.
한 해를 보내며
올해도 저물어간다. 되돌아보면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기쁜 일도 답답한 일도 많았다. 내게 기쁨이 다른 이에게 답답함이 되기도 한다. 극단적인 반목이다. 우리 앞날에 걱정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우리의 젊은 축구선수들은 도하의 기적을 만들어 모두를 하나로 묶고 열광시키며 온 국민의 막힌 혈(穴)을 뚫어주었다. 감나무 삭정이에 까치가 한쌍 앉아 있다.
새해엔 모든 이들에게 복된 일이 주렁주렁 열리길 소망한다. 새해엔 모든 이들에게 너그러운 열린 마음이 전해지기를 소망한다.
이계은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