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로 만나는 평택섶길 풍경 16

2022-08-17     평택시민신문

 

평택의 5일장 세 번째 이야기 ‘송탄의 전통시장들’

미공군기지가 들어서며 모여든 사람들

1952년 OSAN AIRBASE(K-55 공군기지)가 앉으며 부대의 정문이 신장리 쪽으로 생긴다. 미군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라에 달러가 한 푼도 없던 때다. 공동묘지와 호박밭엔 집이 지어지고 부대 진입로 주변으로는 점포들이 들어선다.

이곳은 순식간에 뒤집혀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된다. 별볼일 없던 구릉지대 쑥고개엔 장사치, 오갈데 없던 이북 피난민, 가난한 여인들, 막일꾼, 사기꾼에 도둑들까지 각처에서 숱한 군상들이 모여든다. 이북 피난민이었던 김연청은 지금의 송탄국민은행 자리에 쑥고개 정류소를 낸다. 50년대 중반이었다. 정류소는 아들 김효순에게 이어졌고 송탄터미널의 시초가 된다. 그곳 정류소를 통해 사람들은 계속 몰려든다.

 

쑥고개 정류소 아래 논바닥을 메워 만든 송북시장

장삼용은 아이 둘을 데리고 월남한 피난민이다. 젊고 허우대가 좋았던 그는 미모에 고학력자인 부잣집 딸 김인숙을 만나 결혼까지 한다. 처가의 재력으로 송탄양조장을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60년경 처가의 땅인 쑥고개정류소 아래의 논바닥을 메워 시장을 만든다. 지금의 송탄전통시장(송북시장)이다. 이곳은 아침시장으로 불렸다. 인근 건지, 우곡, 동막과 진위, 서탄의 농가에서 나온 채소와 과일들이 새벽부터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4·9일에 서는 5일장 송북시장은 점점 활발해진다. 주변에 아파트들이 많아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장사가 되니 장돌림들도 몰려 드는 것이다. 길 건너편으로 청과물 점포들이 이전하며 구역도 넓어졌다. 십여년 전에는 전국모범시장으로 선정되며 대통령도 방문했다. 시장의 약국 사거리에서는 민속씨름대회가 몇차례 열렸다. 씨름판은 사람을 모으고 풍물은 흥을 돋운다. 60년 된 시장의 점포주들은 서로를 잘안다. 그들 몇몇은 친목계를 묶는다. 모임 날은 국밥 한 그릇에 로또복권 만원씩을 사서 나눠가졌던 이름도 로또친목계다. 복권이 맞질 않으니 성미급한 사람은 나가기도 했고 새로 들어온 사람도 있다. 2007년 여섯 명이었던 그들은 6월 23일자 로또추첨에서 모두 1등으로 당첨된다. 1인당 1억3천만원씩이었다. 문구사를 운영하던 한 사람은 우연히 복사하러온 그들과 합류하게 됐고 들어가자마자 돈벼락을 맞았다. 그 복권방은 그 뒤에도 1등이 9번 나왔다. 가게 앞에는 지금도 줄을 선다.

 

부대 정문 앞 국제중앙시장

부대 정문 앞에도 시장이 생겼다. 지금의 국제중앙시장이다. 신장동의 상인들, 부대 종사자들, 미군과 동거하던 여성들이 주로 이용했고 저녁 시간에 손님이 많아 저녁시장으로 불렸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주와 햄, 소시지, 치즈, 초콜릿, 음료 등 미제물품은 물자가 귀했던 그때 인기 최고였다. 저녁시장엔 그런 미제물품을 파는 가게가 여러 군데 있었다. 외지인들도 미제물품을 사기 위해 많이 찾아왔다.

최근 정문 앞의 경기가 퇴조함에 따라 저녁시장의 분위기도 쇠퇴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숙박업소의 경기는 좋다. 삼성과 고덕지구의 아파트 근로자들로 인해 방이 없을 정도란다. 부대 정문앞의 부자들은 거의 대형호텔업자들이다. 그들은 대개 맨주먹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도 있고 어느 순간 기회를 움켜잡은 사람도 있다.

운도 따랐고 남다른 수완과 노력도 있었으리라. 그들에 대한 주변 인식은 그다지 후하지 않다. 인색하다는 것이다. 인색한 사람이 어른 행세까지 하면 못 봐준다. 힘들게 돈 모은 사람은 쓰기가 힘들다. 애초에 쓰기를 즐겼으면 모으지도 못했다.

그런데, 돈은 영원히 지킬순 없다. 더 큰 욕심 때문에, 과문(寡聞)한 자식 때문에, 또 예기치못한 이유로 어느 순간 뻐그러지기도 한다. 돈은 그렇게 돌고 도니 세상 사는 재미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필자가 만났던 송탄 사람들

송탄은 나의 공직 첫 출발지였다. 미혼의 참으로 젊었던 시절이다. 당시 인상에 남는 송탄의 인물 몇 분을 소개한다.

 

송탄읍장 김진택

김진택은 읍장이다. 이한림 장군(5·16 때 1군사령관)의 전속 부관이었던 군출신인 그는 매사에 추진력있는 사람이었다. 78~79년에 시행된 ‘서정리 소도읍개발사업’은 옛날 서정리의 초가집과 미로 같은 골목들, 동네를 관통했던 개울을 정비하여 현대화된 시가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블럭별로 담당을 지정하여 추진상황 복명을 받고, 철거대상 건물은 직원들이 동원되어 철거하기도 했다. 철거작업 중 지붕에서 떨어진 직원도 있었다. 사업은 잘 마무리되었고 그 사업분야 전국 1등을 차지한다. 김진택 읍장은 훈장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현장 방문 계획이 잡혔으나 10·26사태가 터졌다. 대통령 방문 때 거리 조경용으로 쓰고자 구입했던 노란색 국화꽃들은 읍사무소에 차려졌던 분향소와 들어오는 그 주변에 쓰였다.

김진택은 나중에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고위직인 기획실장까지 했다. 새마을운동과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잘 나갈 때였다.

 

금괴 1톤을 싣고 귀순한 방진호

방진호는 북한군 대좌(한국군 대령)로 군자금을 관리했던 김일성의 측근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그는 금괴 2톤을 배 두척에 나눠 싣고 자유대한을 향해 탈출한다. 9·28 수복 때였다. 내려오던 중 풍랑으로 배 한척과 금괴 1톤은 가라앉는다. 강화도 위쪽의 황해도 앞바다였다. 결국 금괴 1톤은 가져오는데 성공했고 금괴는 나라에 헌납했다. 이승만 대통령 때다. 대통령과 접견도 했던 그는 송탄에 정착했고 넝마주이 등 전쟁고아들을 위한 ‘평애원’이라는 구호단체를 조직했다.

이북5도민회 명예 ‘자성군수’였던 그는 송탄지역의 청소대행업체를 맡아 ‘평애미화사’로 이름짓고 운영한다. ‘방진호 돈은 보는 놈이 임자’란 말이 생길 정도로 돈 욕심 없던 그였지만 “통일되면 금괴 건지러 가야할텐데”하며 바닷속 금괴 얘기를 자주 했다. 1921년생인 그는 곤궁한 말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금괴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짝귀 영감님

짝귀 영감은 자유당 시절 송탄지역의 정치깡패 보스였다. 5.16 때 깡패들은 잡혀 들어갔고 그 역시 고초를 겪는다. 그 후유증인지 거리에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천만원’, ‘이천만원’ 등으로 경매꾼이 낙찰하듯 값을 매긴다(그저 그뿐이지 행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다). 노년이었음에도 당당한 체구와 형형한 눈빛으로 걸음걸이와 팔짓도 박력이 있고 항상 빨래해 입은 깨끗한 옷차림이다. 시내를 걷다 보면 한번은 만나게 마련인 그였고 하루는 길에서 만난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그는 내게 부르짖는다. “아~ 일조억원!” 경매사상 최고가였으리라. 언젠가부터 그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그의 소식을 아는 이는 없다.

 

세월은 연식(年食)의 속도로 가나?

그 젊었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헤아려보면 40년이 넘었다. 언제 그렇게...

옛날엔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세월이 나이의 속도로 가더라’는 얘기 말이다. 그러나 요즘 그 얘기를 실감한다는 사람들이 나뿐이 아니란다. 아인슈타인의 4차원의 원리가 그것일까? 어떻게 나이 먹은 사람만 콕 찍어서 세월을 빨리 보낸다니... 잡념에 젖어 있는 사이 또 한달이 갔다.

 

이계은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