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로 만나는 평택섶길 풍경 14

2022-06-08     평택시민신문

시내길 통복시장과 옛날 5일장들

안중장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장날은 만남의 날

옛날 5일장이 서는 날은 점포를 가진 상인들, 5일장을 따라 다니는 난전의 장돌림들, 제집의 농축산물을 가지고 나온 장꾼들, 그리고 물건 사러 나온 사람들이 어우러져 북적인다. 그들 중엔 소판돈을 노리는 쓰리꾼도 끼어 있다. 이렇듯 5일장은 주변지역의 사람과 물산이 모여들고, 모여든 모든 것들이 함께 순환된다.

장날은 만남의 날이기도 하다. 이웃 면으로 출가한 딸과 친정 어머니의 애틋한 만남이며, 오랜만에 만난 술 좋아하는 남정네들은 술추렴에 해 기우는 줄 몰랐고, 매파(媒婆)의 손에 이끌려 장구경 나온 혼기 찬 처녀는 맥고자 눌러쓰고 자신을 그렇게 훔쳐보던 사내가 신랑감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자전차왕 엄북동은 평택장 쌀가게 ‘일미상회’ 직원
평택에서 오래된 5일장은 평택장, 안중장, 서정리장이다.

평택장은 원래 철뚝 너머인 원평동에 있었다. 장터는 6·25 직후 지금의 통복동으로 이전 형성된다. 1번국도, 38국도, 평택역의 플랫폼 방향과 군청, 경찰서, 세무서 등의 이전에 따른 자연스런 움직임이었다. 일제강점기 평택장인 원평동 장터에는 쌀가게 ‘일미상회’가 있었다. 직원인 엄복동(1892~1951)은 자전거에 쌀 두 가마씩을 싣고 서울까지 배달을 했다. 그런 그는 1913년 4월과 1922년 5월 열린 전조선 자전차경기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매번 우승 하였다. 그는 국권이 상실된 암울한 시기에 우리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던 영웅으로 당시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인 최초 비행기 조종사였던 안창남과 함께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이라는 노래까지 생겨났다.

이전된 통복시장은 군청 소재지, 철도, 내륙교통의 중심에 입지한 잇점으로 빠른 기간 내에 활성화된다. 포목점인 조성행의 ‘광신상회’는 원평동 구장터에서부터 열었던 오래된 점포였다. 지금은 칠십 중반의 아들 조성묵이 대를 이어 지키고 있다.

차가 귀했던 옛날엔 짐자전거로 서울을 왕복하며 물건을 가져오는 일이 흔했다. ‘개성완구’ 석희봉은 서울 영등포에서 물건을 떠오곤 했는데 당시의 완구류인 딱지, 구슬, 풍선, 딱총, 화약 등은 아이들에게 불티나듯 팔렸고 평택지역의 소매점에 물건을 대어주던 그는 짐자전거로 하루에 서울을 두 번 다녀오는 일도 있었다.

 

60년대 초 통복시장 싸전에서 황소가 걸린 전국장사씨름대회 열리기도

통복시장엔 우시장과 싸전이 있었다. 우시장은 지금의 성북파출소 주변 일대다. 현재 주차장 앞쪽 넓은 마당이었던 싸전에선 60년대 초 황소가 걸린 전국장사씨름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미곡상 ‘삼육상회’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모았던 성윤봉은 홍원리 자오개에 10여만 평의 큰 염전을 매입한다. 지금의 ‘햇살들농장’ 터다. 덕우리 자산가였던 박재필이 개발하여 자금난으로 넘기게 된 염전이었다.

싸전의 ‘평창상회’ 건물은 다다미방이 있었던 일본식 기와집이었다. 지붕엔 비둘기들이 항상 수십 마리씩 앉아 있었는데 싸전마당에 떨어진 쌀알과 오래된 기와집 추녀는 비둘기들에게 좋은 주거환경이었던 셈이다.

주차장 자리에 있었던 ‘기린옥’은 보신탕으로 유명했고, ‘강서면옥’은 냉면과 불고기신선로가 유명했다.

가축 밀도살 사건으로 행정처분을 받았던 강서면옥 홍경세는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장사가 잘되어 전국에 분점을 두는 호황을 누린다. 시장 입구의 ‘대동옥’은 설렁탕, 불고기전골, 궁중전골이 유명했던 평택의 유명 맛집이었다.

통복시장 옆으로는 통복천이 흐른다. 소사지구의 정수장과 배다리 저수지 물길 정화사업으로 수량이 늘고 수질도 좋아져 팔뚝만한 잉어떼가 오르내린다. 천변으로는 걷는 이들이 많다. 시장사람들은 ‘통복동’ 명칭에 애착을 갖고 있다. 통복시장과 통복천의 역사와 더불어 그들의 정체성으로 길이 간직하고픈 이름인 것이다.

 

안중장은 평택지역에서 이름난 큰 장
옛날 서부 4개면, 당진 소장수들, 화성 상귀장꾼들, 발안장꾼 합세

안중장은 평택지역의 5일장 중에도 이름난 큰 장이었다. 옛날 서부 4개면의 사람과 물산이 모여드는데다, 당진 한진포구와 만호리 포구를 왕래하는 똑대기(통통배)에 실려오는 목매기 송아지들과 소장수들, 홍원리 자오개 나루를 통해 오가던 화성 상귀장꾼들, 발안버스로 오는 발안장꾼들이 합세해 안중장날은 외곽까지 사람들로 붐볐다.

안중장은 우시장과 싸전이 유명하다. 농기계가 변변치않던 시절 일소는 큰 자산이었다. 소말뚝이 총총이 박혀있는 넓은 우시장은 장날이면 소와 사람으로 버글거렸고 허리에 전대를 두른 소장수들은 입담이 걸죽했다. 소전 건너 멀리 보이는 건물은 이계성이 주인이던 안중양조장이다.

화양리에서 들어오며 대장간을 지나 올라선 재빼기에서 싸전까지의 긴 내리막길이 안중장에서도 가장 번화했다. 그 길에는 포목점, 신발가게, 옷가게, 그릇가게, 만물상, 건어물상, 국밥집, 생선전 등이 있었고 길 가운데는 노전이 자리잡아 장날이면 사람들로 밀려다녔다. 이곳엔 화교들이 운영하는 짜장면집이 세곳 있었는데 골목 위쪽의 ‘신생반점’은 손씨였고 62년 화폐개혁 때 그의 집안 궤짝속에 숨어있던 구화폐가 가마니로 나왔다. 그 건너편 ‘전부관’은 우씨였다. 그는 침을 잘 놓았고 중국무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는 수의사는 아니었으나 병든 소를 고치기도 했다. 골목의 아래쪽에 있던 ‘부흥원’은 냉씨였다. 그는 화교지만 안중초교를 나온 인연으로 안중초교 축구팀 코치를 맡기도 했다. 그의 아들은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안중김씨의 시조가 된다. 중학생이 되기까지 짜장면을 못먹어봤던 나는 비오는 날이면 버스비로 타내던 10원씩을 꿍쳐 모은다. 어느날 학교가 끝나고 혼자 찾아간 집이 부흥원이다. 주인 냉씨는 호떡모자에 파란옷을 입고 있었다. 당시 짜장면 값은 30원 정도였고 동무를 데리고 갔다면 십리 넘던 학교를 비 맞고 걷는 일이 더 늘어났으리라.

 

대형 할인매장에 밀리던 안중시장
정부지원과 자구노력으로 자리잡아가는 추세

대형 할인매장에 밀려 내리막을 걸어온 전통시장은 지원과 자구노력으로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다. 안중시장 번영회 7년차 회장인 권혜정은 그동안 공모사업을 통해 안중시장의 현대화를 많이 이뤄냈다. 그녀는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10년간 유학한 서양화전공의 미술인이다. 골목 위쪽에 있는 그녀의 집은 안중 최초 이층집으로 근대 문화유산감이다. 옛날 ‘동아서점’에 이어 모친이 수예점을 했던 자리다. 권회장은 안중시장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시장을 소재로 ‘길마골사생대회’를 연다. 전통시장의 공감 확산을 꾀함이다. 역사의 손때가 묻은 집 한켠을 작은 갤러리로 꾸밀 계획도 갖고 있다. 그녀는 지역의 정체성 보전을 강조한다. 많은 소중한 것을 쉽게 망가뜨려온 우리들에게 권회장의 열정은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

그녀의 열정이 결실을 맺기 바란다. 그 결실이 우리 마음의 치유제로 다가오기를 소망한다.

 

이계은
평택섶길해설사
전 평택시 송탄출장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