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로 만나는 평택섶길 풍경 13
비단길 심복사
‘평택섶길’은 평택의 작은 길들이다. 16개 코스 오백리에 이르는 길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에 이야기와 함께 짜여 있다. 섶길 여정에는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공직 은퇴 후 취미생활을 찾던 중 섶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필자는 평택에서 나고 자랐지만 섶길을 처음 걷는 날 곳곳에 숨어있는 경관이 놀라웠다. 그림 그리기에 약간의 소질이 있어 평택섶길 풍경을 펜화로 그려 간단한 글과 함께 평택시민신문에 한달에 한번 연재한다.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분들이 섶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고장을 더 알게 됨은 물론 건강과 즐거움을 얻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진위천과 안성천이 만나 넓어진 물길을 요즘 들어 평택인들 중엔 ‘평택강’이라 부르는 이들도 더러 있다.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이 여주사람들에게 ‘여강(驪江)’이라 불리우듯 함인데 모름지기 자연과 사물의 이름은 사람들 입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니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이 흐른 후엔 그 이름도 생경하진 않으리라.
물길은 말발굽 모양으로 오성들을 감아 흐르다가 길음리에서 꺾이어 도두리들 그 건너편 옛 어부들이 육측곶이라 부르던 광덕산 뿌리에서 둔포천이 합세해 평택호로 나아간다.
지금은 팽성 내리와 오성들을 연결하는 팽성대교, 팽성 신대리와 현덕 신왕리를 잇는 국제대교, 길음리에서 세종 신도시로 가는 국도 43호 교량 등으로 같은 생활권이 되었지만 예전엔 강을 사이에 두고 팽성과 오성·현덕은 서로 ‘물근너’라 부르던 딴 세상이었다.
이곳은 바다였던 때 물고기가 지천이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어서 고기들이 산란을 위해 모여들었던 때문이다. 숭어 새끼인 동어는 11월 하순경부터 내리와 길음리 앞에서 잡히다가 차차 넓은 바다로 움직여 1월경이면 만호리 앞바다까지 어장이 형성된다. 한겨울 석쇠에 구워 먹던 동어는 기막힌 맛의 생선이었다. 참나무 잎이 나올 무렵인 4~5월경 숭어철엔 전국에서 몰려든 어선들이 덕목리, 신왕리, 대안리 앞 바다를 가득 메웠다.
아주 먼 옛날 파주 문산 포구의 어부 천을문은 숭어철이 되자 동료들과 함께 이곳 덕목리 앞바다까지 와서 고기를 잡는다. 하루는 그의 그물에 묵직한 돌이 걸려 올라오고 버리면 또 걸려 오기를 거듭하던 중 자세히 살피니 돌부처였다. 불심이 깊었던 그는 하늘의 계시임을 느껴 불상을 지고 인근 광덕산으로 간다. 어느 자리에 이르러 불상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지며 꼼짝을 않자 그 자리에 부서진 배를 이용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바로 심복사다(전문가들은 석불 좌대 장식의 문양으로 보아 통일신라 때의 부처로 보고 있다). 보물 제565호인 심복사 비로자나 석불은 대적광전에 본존불로 모셔져 있다. 산스크리트어(梵語, 범어)로 ‘바이로차나’는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부처의 진리 자체의 모습을 뜻한다.
심복사를 찾아간 날 주지 스님 뵙기를 청하니 보살님 한 분이 손으로 가리켜 계신 곳을 일러준다. 그곳으로 가보니 스님 한 분이 굴삭기 조종석에 앉아 작은 트럭에 흙을 싣고 있다. 주지이신 성일 스님이다. 마당과 길에 마사 흙을 깔아 주는 작업 중 이란다. 공사판의 노동자와 같은 일들을 경내에서 손수 하시는 스님은 뜻밖에도 선방에 주로 계셨던 선승(禪僧)이셨다.
차를 대접하며 들려주는 말씀과 풍모가 편안하고 소탈하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석가모니의 게송(偈頌, 시로 자신의 감흥을 읊는것)이다. ‘유아독존’은 석가 개인을 지칭함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개개의 존재를 뜻하며 모든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존귀함을 상징한다.
성일 스님은 ‘빛따라 한발디딤’의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그 빛은 밖에 있질 않고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빛이다. 명상과 참선을 통해 자기 자신 안의 빛을 찾아가는 자기성찰의 길인 것이다. 스님이 청개구리 형상의 미니어처를 보여 주신다. ‘나의 빛으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항상 정반대로 엇나가는 청개구리였기에 마른 땅에 묻히길 소망했던 어미 개구리의 의중은 청개구리의 뒤늦은 후회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결국은 또 반대로 된다. 비만 오면 떠내려가는 어미의 무덤에서 슬피 울어댄다는 청개구리, 그 청개구리는 깨달음을 진정 얻은 것일까. 지난 4월30일 평택 불교사암연합회 주관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 때 연극으로 꾸며 심복사 불자들이 열심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평택 불교사암연합회(회장 적문스님)는 평택지역의 정신문화 유산인 원효, 의상, 혜초의 구법(求法) 발자취를 형상화시키는 문화 활동과 함께 ‘빛따라 한발디딤’의 내면적 깨우침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스님들의 문화 열정이 주목받는 이유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심오한 불교 철학의 이야기에 심취하며 공부 많이 하고 일어서는 마음이 뿌듯하다.
5월 산사의 숲이 푸르르다. 그 숲에서 검은등뻐꾸기의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